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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국가의 동량(棟梁), 공무원

admin 기자 입력 2023.03.03 11:20 수정 2023.03.03 11:20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얼마 전 신문 보도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촉망받는 국가 인재들이 공직에서 여차하면 떠난다는 내용이다. 내 개인으로서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지극히 사랑하는 가족 여럿이 공직에 몸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자식들에게 공직의 길을 밟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했던 지난날의 무한책임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처럼 누구에게나 공무원직을 권유하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공무원 정년 퇴직시한을 한 10여 년을 앞둔 자식들이 종종 집에 들르는 날엔 자식들이 그토록 믿음직스럽고 든든할 수가 없다.

첫 사회생활의 진로를 의논할 때도 토를 달지 않고 순순히 따라 준 자식들이 지금 생각해도 고맙기가 한량없다.

내가 자식들에게 공무원의 길로 들도록 채근한 사연은 여럿이다. 70년대 중동 석유 파동으로 나라 전체의 경제 사정이 극심한 불황에 휩싸였다. 30대 초반이든 내가 경영하던 사업장에도 불황의 쓰나미가 덮쳐 속수무책 쓰러졌다.

그 후유증은 오랜 기간 가족에게 깊은 상처와 견디기 힘든 삶의 고초를 안겨줬다. 내 인생의 암흑기였다.

그때 먼 훗날 내 자식들이 성장하면 어떤 경우일지라도 나와 같은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사업이란 事자 근방에 얼씬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심지어 중소기업에 취업도 말릴 생각이었다.

유비무환의 한이 얼마나 사무쳐서 그렇겠나. 왜냐면 내가 공장을 폐쇄할 때 직원들에게 밀린 임금을 다 주지 못한 아픔이 남아 있어서 그렇다. 가진 것 털어놔도 모자라 그대로 청산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소싯적 고향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 되지 않아 아버지는 일본에 떨어져 계셨다.

그런 가정사로 집 안팎의 대소사는 어머니 혼자 감당할 몫이었다.
면사무소에 서류 한 장 뗄 때도, 금융조합에 돈을 빌릴 때도 어머니 스스로 해결했다.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땐 이른 아침부터 머릿결을 곱게 손질하시는 정갈한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광복을 전·후한 혼란기였던 4∼50년대는 너나 할 것 없이 형편이 어려웠고 시대도 분분했다.

그런 시기에 어려운 고충을 상담하려면 상대 인격을 존중해서 옷이라도 깨끗하게 차려입는 게 예의였던 것 같다.

그런 걸 20대에 들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당시 어린 마음에도 관공서에 갈 때는 으레 좋은 옷을 제대로 갖추어 입는 게 예의인 줄 알았다.

평소 관공서에 가시거나 공무원과 접촉하며 대화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많은 걸 배우고 좋은 느낌도 받았다.

흔한 말로 ‘첫인상이 마지막 인상이다’라는 말이 있다. 첫인상이란 상대방에게 나의 모든 모습을 심어주는 총체적인 이미지표현이다. 우리는 첫인상이 좋은 사람에게 우호적인 친근감을 느낀다.

따라서 첫인상은 만남과 동시에 소통의 시작이기도 하다.
지난날 어머님이 행하셨던 모습들을 반면교사로 나는 항상 반듯한 차림새와 바른 언행을 쓰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다.

아마도 내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사회생활 초년은 부산문화방송국에서 시작되었다. 방송국 직원인 만큼 업무 특성상 언제나 품위를 지키려 노력했다.

개인적으로 관서나 공공기관에 들를 적엔 행장(行裝)을 여미고 또 여미며 출입했다. 어떤 관서든 담당 공무원의 직급이나 남·여를 가르지 않고 존칭으로 예의를 깍듯하게 표한다.

그런 자세를 보고 첫인상을 나쁘게 볼 공직자가 있을 수 있겠나. 가는 말이 고운데 오는 말도 당연히 곱게 오는 법이지 않겠나. 그게 내 삶의 문법이고 지혜로움이라 생각한다.

늦깎이 80줄에 문학 활동을 하면서도 내 처신은 예나 지금이나 행여 허물어짐이 있을까 거울 속을 보고 있다. 가볍게 여긴 언행의 오해로 욕먹을 짓거리는 아예 하지 않으려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나라의 골격을 떠받치는 백만 공무원은 국가 발전에 헌신한 시대의 역군이다.
박봉에도 국가에 봉사한다는 의무와 자부심을 가슴에 채우며 버텨온 공무원들이다. 그동안 음지에서 묵묵히 일한 보상은 차치하고 실질적 대우도 받지 못하는 소외감에서 공직을 내려놓으려 하는 건 아닌지 속내를 알 수 없다.

현재 공무원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나 받는 급여가 민간 기업에 다니는 샐러리맨들보다 못하다고 생각을 한다니 말이다.

한국행정연구원의 보고서 내용을 보니 그들이 이직하려는 심정을 조금은 알 듯하다.
공무원들이 임용될 때의 선서, ‘나는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헌법과 법령을 준수하고 국가를 수호하며 국민의 봉사자로서 업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임을 엄숙히 선서합니다’라 하지 않았던가.

그렇듯 국가 발전에 성실히 수행할 것을 다짐하는 ‘선서’의 초심이 흔들린다니 몹시 안타깝다.
공무원 모두가 꿈을 이룰 때까지 공직이란 둥지를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누구의 노랫말처럼 ‘노력하면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라고 했듯이 머잖은 세월에 좋을 날 오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기대하며 좀 더 오래 일들 하면 어떨까 싶네.

옛이야기지만 면장이 어디 행차 떠나면 나리 납신다며 허리 굽혀 받들지 않던가.
학교엘 다닐 때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식장에는 교장 선생님과 면장 나리가 언제나 상석에 나란히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만큼 면장도 명예로운 공직이다.

가끔은 그런 자리에 오를 내 자식의 모습을 무시로 생각할 때도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상상인가.

공무원을 둔 부모는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자식 자랑도, 소문도 내고 싶은 게 솔직한 부모들의 고백이다.

욕심 같아선 고을 현감까지 올랐다 물러나면 ‘가문의 영광’이라 잔치라도 크게 벌리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다. 과유불급이라 탓할 건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환상이다.


황성창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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