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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만 원장 |
ⓒ N군위신문 |
2020년 2월부터 21, 22, 23년 3월까지 3년간은 코로나19로 인해 참으로 힘들었다.
마스크를 써야 하는 불편도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이 세계적으로 많았다.
우리 속기계도 운영이 어려워 속기학원의 문을 닫은 곳이 많다. 나 역시 돈만을 생각했다면 오래전에 폐원(閉院)을 하고 다른 것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속기학원은 나의 천직(天職: 타고난 직업이나 직분)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수강생이 1명이나 2명뿐이라도 결코 문을 닫을 수 없는 것이다.
한 때는 대구 경북에 컴퓨터속기학원이 8곳이었으나 지금은 한 곳밖에 없다.
길을 가다보면 오르막이 있다가 내리막도 있고, 내리막이 있다가 오르막도 있기 마련이다. 한 가지를 꾸준히 오래 하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어려운 일도 있는 것이다.
코로나 직전에 학원 앞 한의원이 나가버렸다. 월세 350만 원을 받던 것이 도리어 관리비를 매월 80만 원씩 물어야 하고 은행 빚 이자는 자꾸 올라서 3년간 마음고생이 참으로 많았다. 그런데 지난 2월 말 치과의원에 계약, 5월부터 월세를 받게 되어서 걱정을 덜게 되었다.
내가 속기를 처음 접한 것은 1965년 군위군 의흥중학교 3학년 때이다. 전주에서 오신 정아랑 선생님이 한 시간 동안 한글기음식 속기를 특강하고 가시면서 프린트물로 된 서너장의 한글속기 맛보기를 팔고 가셨는데, 나는 전교 학생회장이라서 공짜로 얻어서 보았다.
대구상고에 입학을 했으나 상업과목에 흥미를 잃어 웅변을 배우면서 속기학원을 찾았으나 대구에는 한 곳도 없었다.
그래서 서점과 헌책방을 뒤져 여러 가지 속기책을 샀다. 그러나 같은 글자는 ‘가’자 밖에 없고 다 달랐다.
내가 익힌 정아랑 선생이 지은 유인물을 기본으로 해서, 남천식 일파식 등 속기를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1969년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다니면서 한국웅변속기연구원을 차려 웅변과 속기를 가르쳤다.
결혼 후 군위군과 경상북도에서 행정공원을 4년간 한 후 영남일보 기자 시험에 합격이 되어 언론계로 자리를 옮겼으나,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대구매일신문사로 넘어갔다.
신문사를 두 개 합했으니 기자가 배로 많아져서 사직을 강요받고, 나갈 준비를 하게 되었다.
웅변은 제자들이 웅변 스피치학원을 하고 있어, 상도의상 할 수없어 못하고, 속기 과외교습으로 한국속기연구원을 개원하여 언론계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니던 신문사에서 ‘넘버원을 찾아서’ 라는 시리즈에 ‘속기사 이수만 씨’라고 대문짝만하게 소개되어서 난리가 났다.
그 기사를 신문사 간부들이 보고 사회부 기자를 시켜주어서 속기학원과 신문기자를
같이 할 수 있었다. 속기학원에 부원장, 강사, 상담, 경리, 운전기사 등 6명의 직원을 채용하여 운영했다. 대한민국에서 말단 기자가 운전기사를 채용해서 자가용을 타고 다닌 사람은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속기학원 덕분에 대구 중구에서 국회의원 세 번, 중구청장 두 번, 대경신문 발행인(대표) 등으로 많은 돈을 내버릴 수 있었다.
우리 집은 속기사 가족이다. 장남은 속기학원 부원장 겸 한국녹취사무소 대표이며, 큰 며느리도 속기 자격증을 따서 녹취사무소 일을 하고 있다. 딸 둘도 컴퓨터속기 자격증을 따서 법원 속기직 공무원을 한 지 오래되었다. 차남만 속기 관련 일을 하지 않고 일반 회사에 다니는데, 딸 둘 중 하나는 속기직 공무원을 만들자고 약속했다.
내 나이 벌써 70대 중반으로 빠르면 5년 길어야 10년 여생이지만 요즘도 열심히 살고 있다. 오전 8시에 집을 나서면 지하철을 타고 8시반 속기학원에 도착, 9시 반까지 속기를 가르치고, 가까운 유림(儒林)단체인 춘추회(春秋會)에 출근해서 상임부회장으로, 또 대구경북언론인회 사무총장으로서 일을 본 후 매일 지인들과 맛있는 중식을 먹는다.
오후에도 속기학원에 가서 내일 교재 녹음을 한 후 3시 반 속기 강의를 한 후 여러 사람을 만나고, 저녁 6시 반부터 야간반 지도를 한 후 빨라야 8시 반에 아내와 퇴근을 한다.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한국컴퓨터속기학원 원장 이수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