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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누부야, 훨훨 털고 일어나라

admin 기자 입력 2023.05.02 16:31 수정 2023.05.02 04:31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그늘진 곳에서 빨간 꽃 한 송이를 피운 누나가 자랑스럽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님 두 분과 누님 두 분 일곱 식구 모두는 조상 때부터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다.

큰형은 금융조합에 다니시고 작은형과 누나는 학교에 다니고 나는 어려서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집에서 그냥 놀고 있다. 점심때가 되면 큰형한테 도시락 심부름한 것이 유일한 낙이다.

6·25 전쟁으로 살림이 어렵고 힘들 때 큰누나가 시집을 갔다. 큰누나가 떠난 빈자리에 작은누나가 채워준다.

작은누나는 무슨 일에도 열정적이고 생활력이 강하다. 당시는 옷을 집에서 손수 해 입었다. 양재학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긴다.

누나는 양재학원을 졸업하고 소소한 옷가지를 집에서 손수 지어 입었다. 경찰서 전화 교환수로 근무하면서 어려운 살림에 많은 보탬을 주었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 엄마가 너는 아버지 일 도와드리고 중학교에 가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고 중학교에 갈 생각을 포기했다.

누나가 이 사실을 알고 형은 중학교 갔는데 너는 왜 중학교에 안 가려고 하나. 넌 배알도 없나 하면서 야단친다.

누나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누나는 나의 스승이고 은인이다.”

철부지 하게 누나는 항상 엄마랑 같이 있는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누나가 시집간다는 소리에 얼떨떨했다.

동네 사람들이 먼저 알고 이야기해 준다. 당시에는 대학을 나온 사람이 거의 없다. 누나의 학력은 초등학교가 전부다.

동네 사람들은 대학에 나온 사람 한데 시집을 간다고 수군거리며, 있는 집 딸은 역시 시집도 좋은 집으로 간다며 부러워한다. 누나는 아들 둘, 딸 둘 낳아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어느 날 회사에서 돌아온 매형이 사업을 하겠다며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낸다. 누나는 아연실색하며 넋을 잃어버린다.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려면 약간의 고집도 부릴 줄 알아야 하는데 매형은 그렇지 못하다. 성격이 조용하고 가정적이다.

이러한 성격을 가진 매형이 사업을 한다니 누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매형은 다니던 무역 회사를 그만두고 밤낮 없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

수여 년 동안 큰 어려움 없이 성업을 누렸다. 그럼에도 누나는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사업이 확장해 나가야 하는데 외국 바이어들의 발걸음이 점점 줄어든다. 왜일까 한 번쯤 생각해 봤어야 함에도 매형은 정직과 신뢰만 쌓으면 사업이 번창할 거라고 믿는다.

일찍이 불교에 귀의한 누나는 쓰러져 가는 사업을 일으켜 보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스님들도 하기 힘든 삼천 배를 일주일에 한 번씩 올린다. 그러다 쓰러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누나의 간절한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매형은 남의 눈을 피해 가며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갑작스레 불어닥친 사업 위기에 누나는 정신을 잃었다.
사람 목숨은 고래 심줄보다 더 질겼다.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나 있는 거 없는 거 다 팔아 채무를 정리했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누나는 오갈 때 없어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다.
살이라곤 한 점 없는 뼈만 앙상한 산 송장이다. 하늘도 무심하다. 엎친 데 덮친 격 매형이 힘들어 어려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어린 자식과 누나를 남겨 두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누나는 울며불며 남편을 붙들지 못하고 떠나보낸 것이 죄라면 달게 받겠다고 했던 누나가 이제 의지할 곳마저 잃어버렸다. 비참한 세상에서 어린 새끼 넷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하며 피를 토한다.

누군가가 세월이 약이라 했다. 죽은 자는 떠나고 산 자는 살아야 한다. 머리를 싸매고 멍하니 드러누워 속앓이할 수 없다. 어린 새끼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슬픔을 가슴에 묻고 살길을 찾아 나선다. 온갖 궂은일 등 닥치는 대로 하지 않은 일 거의 없다. 화장품 판매원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간다.

어느 때는 온종일 하나도 팔지 못하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뱀처럼 퉁퉁 부은 다리를 질질 끌고 집으로 돌아온 일이 한두 번 아니었다.

꿈도 희망도 없는 세상 오직 새끼들만 바라보며 사는 누나에게는 살아가기가 너무나 괴로웠다. 날이 훤하게 밝아 오기도 무섭게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을 먹는 둥 만 둥 아픈 다리를 끌고 또 밖으로 나간다.

무거운 화장품 가방을 둘러매고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며 화장품을 파는 누나에게는 한시가 아깝다. 한 개라도 더 팔아야 한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수더분한 옷차림에 손가방을 든 한 부인을 우연히 만난다. 부인이 자기 집에 잠시 쉬었다 가라며 말을 건넨다.

누나는 화장품을 하나 팔아주려나 하는 생각에 가던 걸음을 멈춘다. 잠시도 쉴 새 없는 누나에게는 ‘쉬었다 가세요’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꿈만 같은 이야기로 들린다. 화장품을 팔아야 한다며 극구 거절한다.
그 부인은 화장품을 하나 사주겠다며 한사코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한다. 온종일 하나도 팔지 못했던 누나에게 하나 ‘사주겠다’는 말 한마디에 끌려가다시피 따라 들어간다.

초대받아 그 집안을 두리번거리는 거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눈에 들어온 거 보지 않을 수 없다. 거실에는 십자고상이 걸려있고 집이 조용하고 아늑해 평화로워 보인다.

부인이 따뜻한 차 한 잔 들고 들어온다. 나를 보면서 “삶이 힘들지요?” 저도 한때는 어렵고 힘들던 일이 많았다며 나직한 음성으로 나를 위로해 준다.

잠시 짧은 침묵이 흐른다. 차 한 모금 마시고 부인이 자기 맏아들이 사제 서품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며 눈가에 잔잔한 이슬이 맺힌다.

누나는 사제라는 이야기에 깊은 관심이 끌렸다. 애써 키운 자식을 사제로 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진데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해하며 귀 기울여 듣는다.

누나는 그 부인과 자주 만나면서 좋은 인연이 되었다. 스스럼없이 그 집을 드나들고 했다.
여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그 집에 들렀다. 낯선 부인 여럿이 모여 기도하고 있다. 걸음을 멈칫하며 섰다.

사제 어머님들의 모임 날이다. 오가도 못하고 엉거주춤 들어가 사제 어머님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가 감명 깊었다. 돌아와서 깊은 생각에 빠진다.

그날로부터 예사로 보아왔던 성당이 눈에 들어오고 성당 앞을 지날 때면 자연스레 엄숙해지고 고개가 숙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당에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맏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고 하느님만 믿고 의지하며 살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끓어오른다. 눈 내리든 어느 날 누나는 친숙하게 지내온 사제 어머님과 같이 성당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사제 어머님은 누나가 세례를 받을 때까지 교리를 같이 받으며 동행해 주셨다. 누나는 세례를 받으면서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살겠다고 맹세하였다.

누나는 매일 같이 성당에 다니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하느님께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기울어진 가세(家勢)를 바로 잡아주시고 어린것들을 잘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4남매를 독실한 신자로 두 딸 모두 출가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맏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고 우리 가정 모두에게 건강을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얼음 같은 지난 질곡의 세월을 모두 잊고 온 가족이 하느님의 자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매일 같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러하던 누나가 어느 날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병실에서 십여 간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다.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늘 해맑은 얼굴로 기도하던 누나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온 가족이 기쁨에 넘친다. 주님의 은혜로 맏아들이 2001년 1월 11일(목) 오후 2시 명동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는다.

사제가 된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누나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누나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던 날 2001년 1월 14일(일) 12시에 아들 김상균 다니엘 신부님이 부산 중앙 천주교회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다.

창밖에 하얀 눈이 소록소록 내리며 축복해 준다. 그늘진 곳에서 빨간 꽃 한 송이를 피운 누나가 자랑스럽다. 누부야, 훨훨 털고 일어나라.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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