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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군위 인각사를 다녀온 소회(所懷)

admin 기자 입력 2023.05.17 16:36 수정 2023.05.17 04:36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지난 4월 마지막 주말 팔공산악회에서 코로나 이후 모처럼 봄나들이를 했다. 가는 목적지에 군위 인각사가 포함되어 가족을 동반했다.

인각사를 관광 및 문학기행 등을 목적으로 7∼8차례 다녀온 것 같다. 앞으로도 틈나면 가고 싶은 곳이 인각사다.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64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다. 1283년 고려 충렬왕은 78세의 일연 스님을 ‘나라의 스승이 될 만 하다’는 뜻에서 승려로선 가장 높은 국사(國師)로 삼았다.

종신직인 국사는 개경에 머물며 왕의 자문 역할을 해야 하는데도, 이듬해 95세에 드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개경에서 인각사로 내려왔다. 고려 충렬왕 7년(1281년) 일연 스님은 이곳에서 민중의 역사 ‘삼국유사’를 비롯해서 많은 서적을 편찬했다.

충렬왕은 신하에게 일연 국사가 안거하고 있는 인각사의 환경을 살펴보도록 일렀다. 명을 받은 신하는 산간오지(山間奧地)이긴 하나 평지라 노모 모시기에는 좋다는 내용을 보고했다.

이에 충렬왕(1284년)은 인각사를 크게 중건토록 명하고 토지 백여경(百餘頃)도 내려 국사(國師)의 안거지(安居地)로 정하였다. 일연 국사가 인각사에 주석하면서부터 인각사는 불교의 중심이 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전국불교대회 격인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이나 열렸을 정도라면 사찰의 규모가 어마어마했을 것으로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231년 고려 고종 18년 몽골이 고려를 침략해 40년 넘게 나라에 전쟁의 참화를 입혔다. 전란이 극심한 시절을 전후해 일연 스님이 집필한 책은 불교의 교리만을 주제로 하지 않았다.

고려가 몽골 침략으로 백성들의 재산과 인권이 약탈당하고 유린당하는 참상을 기록으로 남긴 책이 ‘삼국유사’다. 고조선의 단군신화부터 몽골 등의 외세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의미를 담았다.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 문화의 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전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일연스님은 충렬왕 15년(1289년)에 8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노년에 인각사에서 노모를 지극히 봉양하고 삼국유사를 편찬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이런 공덕을 칭송하여 충렬왕이 내려준 시호가 보각(寶覺)이며, 함께 내린 탑호는 정조(靜照)이다.

인각사 하면 보각국사, 보각국사라 칭하면 삼국유사를 떠올린다. 그렇게 유서 깊은 인각사가 1598년 조선을 전란 속으로 휘몰았든 정유재란 때 몽땅 불타 잿더미로 변했다. 이후 폐허로 방치되었고 더욱이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인각사 사지(寺址)가 자칫 지도상에서 사라질 뻔했다.

불운한 시대를 거치면서 인각사가 한때 정몽주 서원으로 십여 년 사용되기도 했다. 그 후 조정에 탄원서를 넣어 차츰차츰 절로서 역할을 하게 됐다. 옛 모습으로 복원 중이라고 하나 언제 가봐도 어수선하고 절간이 휑뎅그렁하다.

울타리도 없고, 일주문도, 사천왕도 보이지 않으니 그런지는 모르겠다. 보각국사의 명성과는 너무 멀고 달라 실망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화산 자락에 웅크려 학소대를 마주한 인각사를 보노라면 을씨년스럽기 한량없다. 지금도 복원 중이라는데 구산문도회를 열던 옛 인각사의 융성했던 그때 모습을 과연 볼 날은 있으려는지.

종무소를 지나 왼쪽으로 극락전, 명부전 등 요사채가 보인다. 뒤쪽으로 산신각, 보각국사비, 보각국사 정조지탑이 있다. 정면 석조여래상은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뭉그러진 눈과 코는 풍화로 인해 한낱 암석으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일연 스님 주석 때의 인각사 본래 모습을 볼 수 없으니 보각국사의 흔적 찾기란 지극히 난망하다.
경내 문정희 시인의 시 ’돌아가는 길‘이 절창이다.

“다가서지 마라/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어느 인연의 시간이/눈과 코를 새긴 후/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자연 앞에/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완성이라는 말도/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돌아간다는 말은 원래 있었던 곳으로 간다는 뜻일 테다.

부처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져 그냥 돌이 되는 과정을 완성으로 본 것 같다. 완성이라는 말도 참 부질없는 것이다. 문정희 시인은 ’돌아가는 길‘ 시 한 수로 정지용문학상과 불교문학상을 받았다고 했다.

인각사 관광을 마치고 법당을 향해 합장반배로 아미타불을 염송하며 절에서 물러나 지척에 있는 군위 댐으로 이동했다. 댐에 저수량이 그득할 줄 여겼는데 바닥이 드러날 판이다.

마침 아침부터 봄비가 내리다 그치다 하니 내리는 김에 푹 왔으면 가뭄도 해소하고 작물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었다.

예정시간이 지나 댐 구경을 마치고 군위를 향해 차가 움직였다. 내려오는 오른편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학소대가 보인다. 봄비 내리는 학소대, 운무에 살짝 가려진 신록의 푸른빛이 한 폭의 수채화다. 커브길 삼국유사로 끝머리에 가파른 지맥을 두른 옥녀봉은 지난해 산불로 화상 입은 아픔이 언제쯤이면 아물어지려나 마음 아렸다.

한 10여 분 달렸을 즈음 의흥향교 건물이 멀찌막이 보였다. 그곳 향교를 꿈엔들 차마 잊을 수 없다. 1950년대 중학교 3년 내내 공부했던 곳 아니던가. 추억을 감춰 둔 향교 앞을 지나 남천 제방 위를 달렸다.

위천 건너 푸른빛에 덮인 장미산이 마주치자 내 눈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릴 때 장미산 아래서 농사짓든 우리 집 논밭이 아른거린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 추수까지 엄마와 함께 긴긴 고랑에 땀 흘리며 김매기에 한숨짓던 논밭이 아니던가.

한여름 간간이 쏟아붓는 폭우로 냇물이 넘실거릴 때는 소를 타고 냇물을 건널 땐 소등에서 신나게 헐떡거린 적 한두 번 아니었다. 이런저런 향수에 고향의 산천 수목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옛 고향의 풍경이 아스라하니 불현듯 정지용 시인의 ’향수‘가 떠올랐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 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히 리야 ---(2, 3, 4연 중략)---

하늘에는 성근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히 리야.”

이 시는 고향의 평화롭고 한가로운 풍광을 보듯 정겹게 잘 드러냈다. 미치도록 소박한 고향 산천의 아름다운 정경 묘사와 참신한 이미지들은 향수의 정서와 적절히 섞이면서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펼쳐진다. 고향은 어머니 젖가슴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둥지다.

망향에 젖어 껌벅하는 사이 점심 먹기로 한 민속한우식당에 도착했다. 뜻밖에 장판철 군위읍장님과 김조훈 부읍장님, 군위신문 사공화열 대표님, 그리고 배용환 사장님의 따뜻한 마중에 감사한 마음 어디 비할 데가 없다. 식탁에 앉은 후 인사를 주고받으며 마중 나와주신 귀한 분들께 큰 박수로 화답했다.

이른 아침 간식으로 끼니를 때운 터라 점심 시장기를 한창 느낄 시간이다. 고향에 소문난 한우무한리필식당에 왔으니만큼 반주를 곁들며 맘껏 먹었다. 잠시 쉬면서 오늘 환영해 주신 분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다음 갈 곳을 서두르고 있는데 군위군에서 ‘사랑의 마음’을 담은 선물까지 줘 염치도 접어놓고 받았다. 추억의 시선을 머물 공간은 아무래도 고향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코스인 구미 금오산 입구 주차장에 내렸다. 이슬비에 안개구름도 짙어 어둠이 깔렸다. 케이블카를 타고 가는 금오산 중턱은 운무가 계곡을 가로질러 장관이었다. 영흥정 음수대에 내려 해운사를 둘러본 후 곧장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금오산 풍경에서 세월만큼이나 후닥닥 지나가는 봄을 봤다.

잠시 스치는 인연처럼, 이미 지고 없는 마음 아픈 꽃대들이 봄비에 젖어 눈물방울을 흘리고 서 있다. 넓은 주차장 뜰에는 축제 준비로 북적거렸다. 어둠이 깔리자 우리 일행은 하루의 관광 일정을 마치고 부산으로 갈 차에 몸을 실었다.

신나게 달리든 차가 갑자기 콜라텍 무도장으로 변한 듯 신난 곡들이 울렸다. 모두가 좋아들 했다. 사는 게 다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잔의 소주가 마법의 물약처럼 모두의 마음을 춤추게 하고 있다. 고향의 위천 물길이 어미강, 낙동강 물줄기 찾아 서서히 흐르듯이 내 마음도 언제나 고향, 향수에 젖을 것이다.

황성창 시인(재부 군위군향우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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