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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硝煙이 쓸고 간 70년, 6·25전쟁 비망록

admin 기자 입력 2023.06.18 17:01 수정 2023.06.18 05:01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73년 전, 6·25가 터지자마자 유엔 안보리가 재빠르게 상정한 ‘세 번의 결의안’이 가결된 게 꿈만 같다.

유엔 안보리는 유엔 회원국에 대해 국제법적 구속력을 갖는 유일한 핵심 기관이다. 결의안의 요점은 “유엔은 대한민국이 북한 무력침략을 격퇴하고 그 지역에서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해 줄 것을 회원국들에 권고”하는 내용이다.

이 권고에 따라 회원국들이 한국전에 참전하기를 결심하게 됐다.
전쟁 12일 만인 7월 7일 ‘제3차 결의안’도 통과됐다. 결의안은 유엔군 창설과 함께 6·25전쟁에서 군사작전을 지휘할 유엔군 사령관의 임명을 미국 측에 요구했다.

이에 미 합참은 맥아더 장군을 초대 유엔군 사령관에 추천하고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승인했다. 남침 3일 만에 북한군에 의해 서울이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 주둔하던 미 제24사단 소속 스미스 부대가 제1착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미국이 전광석화처럼 참전하리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런 미국에 이어서 유엔 깃발 아래 회원 16개국이 전투병 파병을, 5개국은 의료지원단을 구성해 한국전에 가세했다.

6·25 때 공군참모총장이었던 김정렬 전 국무총리는 생전에 “미군의 참전은 사실상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도 자서전에서 “6월 25일 밤 미국 지도부의 만장일치로 결정되어 신속한 파병이 이루어진 것은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역시 “6·25전쟁에 참전을 결정한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한국인들의 운명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며 그를 대한민국의 대부代父로 불렀다.

1950년 7월 4일을 기하여 한미 양국 군대가 연합전선을 형성하지만, 북한군의 공세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다.

7월 5일 미군은 북한군과의 오산 ‘개미고개 전투’에서 한국전쟁 중 가장 많은 미군 첫 전사자를 냈다.

8월 13일부터 보름 동안 6·25전쟁의 마지노선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이 전투에서 반격의 기회를 잡은 맥아더 장군은 9월 13일 인천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이후 38선을 돌파하고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했다. 여세를 몰아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밀고 올라갔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우리 군은 다시 남으로 밀려 내려오게 된다.

중공군의 공세에 부닥쳐 전선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해가 바뀐 1951년 4월 22일부터 사흘 동안 영국군 글로스터셔 부대는 파주지역 ‘실마리 전투’에서 남하하는 중공군 7만여 명을 불굴의 투혼으로 총력 저지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 30명이 전사하고 530여 명은 포로가 됐다.
5월 26일은 국군 제6사단이 화천 저수지 일대에서 전개한 ‘파로호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2만5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줬다.

또 8월 31일부터 9월 20일까지 양구에서 벌어진 ‘펀치볼 전투’에서 아군과 적군이 뺐고 빼앗기는 전투에서 우리 국군은 모택동 고지와 김일성 고지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미군은 1951년 7월부터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간에 휴전협상을 시작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순간에도 전투는 계속됐다.

1952년 10월 6일부터 열흘 동안, 철원 지역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과의 쟁탈전을 반복하는 혈전 끝에 백마고지를 사수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1만3000여 명을 격멸하는 전과도 올렸지만, 우리 국군도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 외에도 유엔군을 주도적으로 지휘한 미군은 ‘장진호 전투’, ‘흥남철수작전’, 등 6·25전쟁 1129일 동안 많은 전투에서도 큰 전과를 올렸다.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들어본 적 없고, 한국인을 만나 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상륙한 낯선 땅에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온 젊은이들이 전쟁에서 많은 목숨을 잃었다.

물설고 낯선 타국에서 얼마나 서럽고 원통했을까. 전쟁 발발 이후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동맹국인 미군 3만6516명이 전사했다.

연인원 178만9000명을 파병한 미국은 참전한 전체 유엔군 중 지상군 비율이 50%를 넘는다. 해군, 공군의 참전비율도 90%와 93%이다.

유엔 참전국 중 인명 손실을 제일 크게 본 나라가 미국이다.
6·25전쟁은 김일성이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공산화 침략전쟁이다.
1945년 유엔 창설 당시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화민국(대만)이다. 대만은 1950년에도 상임이사국 지위를 유지했다.

이에 불만이 많았던 소련이 1950년 1월 ‘대만 축출 결의안’이 부결되자 안보리 회의 불참을 선언했다.

5개월 뒤 북한이 기습 남침했다.
안보리는 즉각 유엔군의 한국 파병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소련이 안보리 불참을 선언하지 않았다면, 대만이 상임이사국이 아니었더라면 대한민국의 파병 결의안이 과연 안보리에서 통과되었겠나.

당연히 부결되었을 것이다. 최근 안보리는 중국과 러시아의 상습적 거부권 발동으로 북핵 도발에 대한 안보리 제재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천연자원 하나 없는 척박한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했다.
이런 약소국가에 유엔군을 파병하지 않았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지도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6·25전쟁에서 팔·다리를 잃은 미군 윌리엄 웨버 예비역 대령은 생전에 “자유는 공짜가 없다. 누군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6·25전쟁은 자유 진영이 특정 국가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20세기에 처음 뭉친 전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별세한 고인은 전역 후 한국전 참전용사기념재단 이사장을 맡아 한국전쟁이 갖는 의미를 알리는데 평생을 헌신했던 그는 6·25전쟁의 영웅이었다.

그런데 우리 사회 일각에선 아직도 남침이니 북침이니 하는 논쟁을 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유엔 참전국들이 자기 나라 젊은이들의 목숨을 잃어가면서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아주었고, 전쟁의 폐허 위에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번영, 평화는 먼 곳에서 온 유엔군 용사들이 흘린 피를 담보로 기사회생했다.

대한민국은 세계사에 유례없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보릿고개에 허리띠를 쪼이던 한국에 도움을 준 미국에 은혜는 갚진 못할망정 ‘반미 깃발’ 흔들며 ‘양키 고 홈’을 외쳐대는 일부 배은망덕한 자들은 오늘을 있게 한 역사 앞에 큰 죄를 짓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아직 대한민국은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6·25전쟁 중에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우리 국군이 16만여 명이 전사했지만,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전사자가 12만1879명이나 된다.
그 숫자 안에는 열여덟에 입대한 나의 형도 포함되어 우리는 눈물을 삼키며 70년 세월을 보낸 보훈 가족이다.

전쟁터에 나가 자기 청춘과 일생을 바친 사람을 국가가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국가는 전사자나 유족에게 합당한 예우는 했는지 묻고 싶다. 포성이 멎은 지 70년, 그들이 어떻게 싸워 이 땅을 지켰는지 되새기면서 산화한 영령들 영전에 간절한 추모의 마음을 엎드려 바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8년 새해 아침에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라는 휘호를 남겼다. 온 세상이 아무리 편안하다 할지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험이 뒤따른다고 했다.
안전하다, 걱정 없다고 자만하여 게을리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임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안보 불안의 현실을 보면서 6·25전쟁 73주년을 맞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국관을 다시 한번 음미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황성창 시인
(재부 군위군향우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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