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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꽃 중의 꽃, 무궁화꽃

admin 기자 입력 2023.09.20 00:48 수정 2023.09.20 12:48

↑↑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무궁화 아름다운 삼천리강산.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경찰가의 노랫소리가 조용한 아침을 깨운다.

검은 제복 양어깨에 앙증맞게 앉은 은빛 무궁화꽃이 영롱한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인다.
의젓하고 당당한 모습이 믿음직스럽고 마음이 든든하다.

이른 아침 하얀 장갑 낀 손으로 네거리에서 교통 정리하며, 오가는 사람들에게 건강과 안녕을 빌어 준다. 병아리들이 줄지어 아장아장 걸어가면서 고사리손으로 인사한다. 웃음꽃 활짝 핀 이 아침 행복이 넘쳐흐른다.

경찰은 하루의 업무를 시작하면서 두 손 모아 “오늘도 무사히” 하며 간절히 기도한다. 심보가 뒤틀린 세상이 하루에 수십 건의 사건을 일으켜 사람들을 불안에 잠 못 들게 한다.

불끈 솟아나는 분노의 감정을 억누르고 묵묵히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다하고 있는 경찰의 땀 흘리는 모습에 연민의 정이 간다.

야간 통행금지가 있을 때였다. 젊음이 불과 같이 타오르던 시절 그들만의 세상이다. 친구와 어울려 밤새껏 즐기며 신나게 놀았다.

어느 날 술에 거나하게 취해 비틀비틀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좁고 으슥한 골목길을 더듬거리며 간신히 걸어가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누구야? 꼼짝 말고 거기에 섰거라 한다.
다리가 풀려 흔들거리는 몸으로 담벼락에 기대어 선다. 매가리 없는 희멀건 눈으로 뒤를 돌아보며 당신은 누구시오? 한 팔로 삿대질하며 대든다.

구둣발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린다. 딱 들러붙은 눈까풀을 억지로 떼서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본다.

검은 물체가 얼렁거리며 어슴푸레 보인다. 눈을 찌푸리며 다시 쳐다본다. 통행금지 시간에 순찰하는 경찰인 것으로 보인다. 그만 겁에 질려 숨을 죽인다. 술이 확 달아나고 정신이 번쩍 든다.

이 시간에는 경찰 이외는 누구도 함부로 다닐 수 없었다. 적발되면 경찰서에 가서 조사받아야 한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경찰 뒤따라간다. 생전 처음으로 경찰 조사실에 들어간다. 낯선 건물 낯선 분위기에 기가 죽어 옴짝달싹할 수 없다. 아버지가 아시면, 내일 아침까지 조사받으며 어떡하지? 오만 가지 생각이 번개같이 떠오른다.

세상에 죽으라 하는 법은 없는가 보다. 무궁화 꽃잎 세 개 달린 경찰이 내 다가와서 앞으로 주의하라고 하며 돌려보내 준다.

무섭고 떨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달음박질치듯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숨 막혔던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선다.

세월이 젊음을 낚아채 버렸다. 새카맣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 이마에 잔주름이 한두 개씩 보일락 말락 한다. 영락없는 늙은이 초년생이다. 저녁을 먹고 지친 하루의 피로를 풀며 편안한 시간을 갖는다.

임신한 암소가 소죽을 잘 먹고 끙끙 앓으며 못 일어난다고 전화가 걸려 온다. 수술 기구 등 치료할 거 빠짐없이 챙겨 서둘러 출발한다.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 한둘뿐 휘황찬란한 달빛만 쓸쓸한 거리를 가득 채운다.

밤길 운전은 서툴러 아무리 바빠도 빨리 갈 수 없다. 소가 왜 못 일어날까?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천천히 시가지를 벗어나 구불구불 산 비탈길 따라 올라간다. 골똘히 생각하며 천천히 가는데 갑자기 차 한 대가 경광등 켜고 쌍 라이터 켜고 뒤따라온다.

긴급한 엠블런스 차인 줄 알고, 서둘러 차를 도로 갓길에 세운다. 그 차는 지나가지 않고 내 차 뒤에 바짝 붙여 세운다. 돌아보니 교통경찰 차다.

순경이 차에서 내려 터벅터벅 걸어온다. 일의 경위나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과속했다며 면허증을 내놓으라고 한다.

세상에 이럴 수가! 긴급한 차인 줄 알고 빨리 지나가라고 차를 도로 갓길에 세웠다. 경찰은 과속했다며 시내에서 3km 넘는 산 비탈길까지 따라왔다니 어이가 없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은 없다. 과속했다면 그 자리에서 적발하지 왜 여기까지 따라왔느냐고 대들고 싶었다. 견딜 수 없는 자괴감에 스스로 망가졌다. 세상이 고약하다 하더니 참으로 고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꼭 고약한 세상만 있는 게 아니다. 인심 좋고 인정 넘치는 세상도 있다. 도롯가에 사는 사람들은 너네 할 거 없이 일과를 마치면 차를 차고에 두지 않고 집 앞에 세워둔다.

지금은 주차선이 있어 마음 편히 주차할 수 있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면서도 경찰에서 주민의 편의를 봐준 것 같아 늘 고맙게 생각한다.

평소와 다름없이 차를 집 앞에 세워 두었다. 어느 날 자고 나니 자동차 운전석 뒷문이 주먹만 하게 푹 들어가 쭈그러졌다. 어떡해야 할까 막막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길 경찰서는 특별한 일 없으면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용기를 내 파출소에 신고한다. 경찰 두 분이 찾아왔다.

차 상태를 확인 후 하얀 페인트로 주차 위치를 표시하고 기다려 보라고 한다. 경찰이 다녀간 뒤 무겁던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은근히 해결해 줄 거라는 믿음이 강하게 생긴다.

수사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우리 집 옆에 블랙박스를 달고 있는 개인택시가 있다고 했다. 밤이라 차 번호가 또렷하지 않고 희미하게 보여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차종은 대략 알 수 있다고 한다.

찾을 수 있는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약간의 마음이 설렌다. 며칠 뒤 파출소에서 차 번호를 확인했다며 전화가 왔다.

어느 날 경찰이 차를 들이박고 달아난 운전사 데리고 우리 집에 왔다. 우리나라 경찰의 수사력이 높다는 거를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지만 이만큼 수준이 높은 줄을 미처 몰랐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칫 잘못했으면 영원히 미궁에 빠질 뻔했던 사건을 찾아 신속히 처리하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그때 그 경찰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를 조용히 돌려보내 주신 그 경찰은 지금쯤 조용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을까? 과속했다며 3km까지 따라와 운전 면허증 내놓으라고 하며 임무를 다한 충직한 그 경찰은 지금쯤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겠지. 고마운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건강히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꽃 중의 꽃 무궁화꽃 영원히 우리 곁에서 곱게 피어나길 두 손 모아 빕니다.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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