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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이발관(理髮館) 단상(斷想)

admin 기자 입력 2023.09.20 11:00 수정 2023.09.20 11:00

↑↑ 황성창 시인 수필가
ⓒ N군위신문
올 추석도 코앞에 다가온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라 이발을 하고 왔다.
삼사 십 년 전만 해도 이때쯤 가면 이발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수두룩빽빽하다.

내 순번이 언제쯤 올까 해서 연방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기다리는 것은 예사다. 지금은 일 년 열두 달 365일이 다 명절처럼 풍성하고 좋은 일만 가득 넘쳐 더 바랄 게 없는 세상이 되었다. 예전처럼 명절의 기다림에 설레는 풍경은 아예 찾아볼 수도 없다.

그러함에도 나에겐 이발관에 대한 추억은 하늘만큼이나 많아서 진정 셀 수가 없을 지경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는 이발을 근 80년은 좋게 했으니 이발관에 갖다 부은 돈도 숱할 성싶다. 한창나이 때 사업 관계로 이런저런 미팅도 빈번해 사흘이 멀게 이발관을 찾아 머리카락을 다듬고 광냈다.

그러니 이발비가 좀 들었겠나.
지나고 보니 그때 그 시절이 참 좋았구나 하는 생각에 듬성듬성한 머리라도 예민하게 다듬고 있다.

이발하는 날만큼 기분 좋은 날이 없어 이발관에 들어서기 전 붙박이처럼 붙어 빙빙 돌고 있는 원통형 삼색등(三色燈)을 습관처럼 쳐다본다.

이발소를 상징하는 삼색등은 동맥을 의미하는 빨강색과 정맥을 뜻하는 파랑색, 그리고 붕대를 의미하는 흰색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 삼색등은 1540년 프랑스 파리에서 이발사 겸 외과 의사였던 ‘메야나킬’이란 사람이 고안했던 것으로 이렇듯 유서 깊은 삼색등을 지금도 전 세계 모든 이발관에서 상징 마크로 사용하고 있다.

고대시대를 거치면서 중세까지 이발소가 응급병원 일을 겸하면서 이발사는 외과 의사의 역할까지 감당했다고 한다.

15~16세기 유럽에서는 외과 의학이란 별도의 학문 분야가 없어 수술해야 하는 의사의 역할을 이발사가 대신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발사도 의사처럼 흰 까운을 걸치고 가위질을 하고 있다.

의사의 기질을 유전 받았는지 이발사들이 예외 없이 말씨가 적고 표정도 없다. 단골손님이 십수 년을 제 발로 와서 이발까지 했으면 개근상이라도 줄 법한 데 하세월이다. 이왕이면 인사라도 싹싹하게 하면 손님들이 얼마나 좋아하랴. 누가 이발사들의 무표정한 미스테리를 풀어 줄 수 없겠나.

1745년경에 이르기까지 영국에서는 내과 의사를 ‘닥터’로 호칭한 반면에 이발사 겸 외과 의사는 그냥 ‘미스터’라 불렀다. 아마 당시에는 이발사를 하대해서 그렇게 불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또 이발관을 응급 수술실로 겸해 쓰다 보니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경우 이발소의 위치를 한눈에 확 띄도록 삼색등도 달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식적인 이발의 시초는 구한말 선비였던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며 ‘1895년 11월 15일 고종이 내외 신민에게 명하여 머리를 깎도록 하였다.

일본 마우라 공사가 고종을 위협하여 머리를 깎도록 하였으나 고종은 명성 황후의 장례를 마친 뒤로 미뤘다.

이때 내무대신 유길준과 군부대신 조희연 등이 일본군을 인도하여 궁성 주위에 대포를 설치한 후 머리를 깎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고 위협하니 고종은 긴 한숨을 들이쉬며 왕실 재정을 봤던 정병화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경이 짐의 머리를 깎는 게 좋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정병화는 가위를 들고 고종의 머리를 깎았다’는 기록이 매천야록에 있다.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1895년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을미개혁을 실시하면서 ‘단발령’도 함께 내렸다. 단발령에 반발한 군신이나 백성들이 상당 기간 극렬하게 반대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이발소를 개업한 사람은 유양호이며, 최초의 이발사는 안종호이다. 그는 단발령이 내린 뒤 왕실 이발사로서 왕족과 대신들의 머리를 깎아 주었다.

이발사가 이발하기 시작한 것은 단발령이 내려진 지 6년 지난 1901년부터 서구의 신문명 받아들여 이발소가 점차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1960년대까지는 주로 남자들만 이용했지만 1960년 중반 이후부터는 여자들도 이용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한 일간지에서 차마 보지 말았어야 할 기사를 보게 됐다.
여름철에 기능이 약한 반려견을 관리하는데 필수적인 것이 털 깎아 주기라 했다.

따라서 강아지 털깎기 요금표를 보다 상상을 초월하는 비용에 아연실색했다. 반려견(소형 견 기준)들의 털 깎아 주는데 드는 돈이 적게는 삼사만 원에서 많게는 무려 십 수만 원까지 든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강아지 한 마리 키우려면 먹이고 철마다 옷 사 입히고, 수시로 털깎기 미용도 하고, 보약에 간식도 챙겨주면서 애견유치원(?)까지 보낸다는데 그 많은 돈을 얼마나 벌어야 강아지 뒤치다꺼리를 할 수 있을지 적이나 걱정스럽다.

내가 단골로 이용하는 이발관에 가서 머리 깎고 다듬는데 만원밖에 들지 않는다. 아주 특별한 날은 머리도 깎고, 면도하고, 귀도 후비고 손톱까지 깎아 신수 훤하게 서비스 해주는 풀코스 요금이 3만 원이면 뒤집어쓴다.

삼만 원에 머리 다듬고 나서면 만나는 사람마다 ‘오늘 어디 좋은 곳에 가십니까?!’ 아니면 ‘특별한 사람과 은밀한 데이트 약속이라도 있습니까?’라며 너스레를 떨어도 그 사람이 왠지 밉지가 않고 곱게만 보일 뿐이다. 아무튼, 보잘것없는 얼굴이지만 훤해졌다는 말에 바보처럼 희희 웃는다.

그렇게 80이 넘도록 다듬었던 머리칼이다. 그렇듯 이발하는 날의 즐거움이 강아지 털 깎는 요금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잘난 척 휘젓고 다녔으니 낭패를 당한 것 같다. 씁쓸하다. 명색이 사람 체면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지고 망가졌으니 꼴이 뭔가. 앞으로 강아지를 만나면 멀찌감치 피하든 지 못 본 척이라도 해야겠다. 서 푼어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황성창 시인 수필가
재부군위군향우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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