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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말똥말똥한 눈동자

admin 기자 입력 2023.11.02 23:38 수정 2023.11.02 11:38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덜컥 겁이 난다.
아직도 일하십니까? 이제 그만 쉬세요. 하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사람들이 쉬라고 하는데 무슨 미련이 남아 왜 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 말이 고맙게 들리면서도 때론 듣기 싫을 때도 있다.
남의 일도 모르고 하던 일 다 내려놓고 뒷짐 지고 팔자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면서 하세월 낚는 모습이 보기가 좋게 보이는지 궁금하다.

노인병 중 제일 무서운 병이 노인성 치매라고 한다. 현대 과학으로는 치료가 잘 안되는지 치매 환자를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사람들은 확실한 근거도 없이 치매 환자는 하는 일이 없어 홀로 방에서 천장만 쳐다보고 있다가 고독, 외로움, 쓸쓸함을 견디지 못해 정신적으로 불안해 우울증이 생긴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치매가 올 수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일이 보배다’라고 늘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일을 하지 않으면 게을러지고, 밥맛도 없고, 시들시들 곯아 죽는다며 일을 해야 한다고 노래처럼 하셨다. 아버지는 그 옛날 여든여덟까지 건강히 사셨다.

한 번도 병원에 입원했던 기억이 없다. 아버지의 삶을 보고 배운 우리는 모두 아버지 말씀대로 살면서 이날 이때까지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사는 동안 하는 일이 많을 거다. 나 역시 이 나이 되도록 할 일이 있어서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가축 진료를 하고 있다. 때로는 약간의 마음이 흔들릴 때도 없지 않다.

수의사 직업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좋은 것만 아니다. 겉은 희멀겋게 보일지 몰라도 속은 텅 빈 쭉정이와 같다. 참으로 비참하고 서글프다. 산수 나이 넘도록 진료하며 다녀봤지만, 사람다운 대접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다.

마음을 다하여 진료하러 가도 따뜻이 맞이하기는커녕 방에 들어가자고 헛 인사 하는 사람 하나도 없었다. 인사를 들어야 꼭 좋은 것만 아니다, 사람 사는 데는 예(禮)라는 것이 있어서다.
어느 집이든 그 집 문간에 들어서면 울상이 된 얼굴로 나를 마중하고 이내 마구간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고작이다. 이젠 만성이 되어 으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나마 마구간이나 좀 깨끗하면 오죽 좋으련만 마구간은 소 똥오줌으로 뒤범벅되어 철벅거린다. 송아지와 어미 소는 똥이 덕지덕지 들어붙어 소인지 말 인지 구분이 안 된다. 진료에 정신없는 사이 똥 묻은 꼬리로 얼굴이라도 한 방이라도 얻어걸리면 꼴이 말이 아니다.

영락없는 다리 밑 알거지다. 이런저런 일도 많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왕진 가방을 둘러매고 치료하려 운전대를 잡는다.

지난 9월 제16호 태풍 카눈으로 전국이 물난리로 처참하고, 아비규환이었다. 오락가락하는 비는 그칠 질 모르고 온종일 내렸다 그쳤다 한다. 점심나절에 3개월 된 어린 송아지가 배가 북만큼 불러온다며 전화가 걸려 온다.

비 오는 날은 앞이 잘 안 보이고 노면이 미끄러워 사고 날 위험성이 높아 신경이 쓰인다.
비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쏟아붓는다. 엉금엉금 기어가듯 겨우 그 집 앞에 도착한다.

집주인이 대문간 앞에 기다리고 서 있다.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주인의 예(禮)에 마음의 정이 끌린다. 그뿐만 아니라 마구간은 으레 질벅질벅한데 오줌똥을 빗자루로 쓴 듯 깨끗하다. 송아지는 내가 다가가도 겁 없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빤히 쳐다보면서 꼼짝하지 않고 서 있다.

송아지 상태를 보고 주인에게 고창증 증상이라 상세히 설명해 준다.
주인은 치료를 잘해 달라고 부탁한다. 준비를 마치고 툭 불러온 왼쪽 복부의 피부를 메스로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절개하고 투관 침을 꼽았다. 가스가 쉬~하며 타이어에 바람 빠지듯 빠져나온다.

주인은 가스가 빠져나오는 거를 보고 신기하던지 가스가 빠져나오는 투관 침 입구에 손을 댔다 뗐다 해 본다. 마구간에 똥 구린 냄새가 천둥 친다. 남산 같은 배가 푹 꺼졌다. 불안했던 주인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만족한 주인의 얼굴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막 도착하는데, 주인한테서 전화가 걸려 온다. 시술이 잘 못 된 줄 알고 긴장한다. 푹 꺼졌던 배가 다시 불러오는 것 같다며 한 번 더 와 달라고 한다.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이상했다. 비는 잠시도 쉬지 않고 억수같이 쏟아진다. 신경을 써서 그런지 30여 km의 거리인 데 40km보다 훨씬 더 먼 것 같다.

겨우 그 집 앞에 도착한다. 주인은 긴장된 얼굴로 대문간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인사할 사이도 없이 황급히 마구간으로 걸어간다.

꺼졌던 배가 서서히 불러오는 것 같다. 다시 공기를 빼냈다.
불룩한 배가 쑥 들어갔다. 주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맙다는 인사를 연거푸 한다. 시술하느라 종일 오가며 신경 썼던 하루를 무사히 보냈다.

그 이튿날 또 전화가 걸려 온다. 약간의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를 받는다. 원장님, 한 번만 더 봐주십시오. 이번에 안 되면 포기하겠습니다. 하며 울먹인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다. 여태까지 그렇게 시술해 왔어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처음 당한 일이라 의아했다. 빗속을 불나게 달린다.

대문 앞에 주인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측은한 모습에 연민의 정이 간다.

시술을 무사히 마치고 불렀던 배가 푹 꺼진 것을 보고 주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송아지야! 주인한테 애를 그만 먹이고 빨리 나아서 무럭무럭 잘 자라거라. 어쩜 오늘이 너와 마지막 만남의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

혹여 내 잘못 있더라도 미워하지 말거라, 힘자라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단다. 내 말을 알아들은 듯 송아지는 멀뚱하게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똥말똥한 눈동자로 쳐다본다.
저 어린것이 무슨 죄가 있길래 저렇게 아픈 고통을 받고 있는지 가슴이 아린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면서 마구간을 빠져나온다.

밤잠을 설쳤다. 무거운 마음으로 새 아침을 맞는다. 이른 아침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신경을 쓰며 혹시나 그 집일까 황급히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어제 그 주인의 음성이다. “원장님! 불룩했던 송아지 배가 푹 꺼졌고 사료도 잘 먹고 뛰어놀고 있습니다.” 하며 고맙다고 인사한다. 나도 모르게 손을 합장해서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살려달라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쳐다보던 송아지 모습이 혹시나 눈에 밟힐까 봐 겁이 난다.
세상아! 죽어가는 한 생명이 다시 살아났다. ‘인제 그만 쉬세요.’ 하는 소리를 하지 말거라. 청명한 이 가을에 시원한 소리 한번 듣고 싶다.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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