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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정월 대보름

admin 기자 입력 2024.02.04 16:04 수정 2024.02.04 04:04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풍년을 기원하는 지신밟기 소리가 요란하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큼지막하게 쓴 깃발을 앞세우고 태평소가 고요히 잠든 새 아침을 깨운다.

사람들은 건강하고 평안한 한 해가 되기를 빌며 서로의 복을 빌어 준다. 녹록한 삶은 아니지만, 풍요를 즐기며 한 해를 맞이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 동네에도 밝은 새 아침이 찾아든다. 산꼭대기를 밟고 힘차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새해 소망을 기원한다. 백여 호 넘는 동네에는 여러 성씨가 모여 산다. 그중에 권 씨와 서 씨 두 성씨가 많다.

두 성씨는 서로가 세를 과시하며 지낸다. 정월 대보름 지신밟기 할 때면 으레 서로가 먼저 하려고 한다. 서씨 집안에서 먼저 하면 어머니는 풍장패를 향하여 손사래 치며 아예 못 들어오게 한다. 당시 손사래 칠 정도로 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동네에서 크고 작은 회의가 있을 때 어머니는 항상 앞장서서 주도한다. 그렇다고 무턱대놓고 내 주장만 옳다고 내세우는 것 아니다. 이웃을 보살피고 도와줄 줄 아는 따뜻한 인정도 남다르다.

동네에 슬픈 일 기쁜 일 생기면 내 몸같이 웃고 슬퍼하면서 이웃을 위로하고 다독여 주는 온화한 성품도 있다. 어머니가 참석한 곳에는 어디에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고 항상 웃음꽃이 만발한다.

새해 아침. 여느 때와 같이 어머니는 작은 밥상에 정화수 한 그릇 떠 놓고 꿇어앉아, 두 손 모아 빌고 또 빌고 한다.

어머니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잘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노래처럼 하셨다. 아마도 어머니의 노랫말처럼 자식들이 건강하게 잘 살도록 해달라며 애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부모나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한 없는 사랑을 보고 마음이 울적해진다.

그렇다고 자식에게 매달려 살고 싶어 하는 어머니는 아니다. 지갑에 돈이 두툼하면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 모르는 것과 같이 자식이 잘되어 있으면 그냥 든든한 것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자식이 잘되어 있는 집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자식은 부모의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지신밟기 풍악 소리가 하늬바람 타고 나풀나풀 춤추며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어머니는 둥둥거리는 지신밟기 소리에 마음이 급해진다.

술이랑 떡국이랑 먹을거리 준비하느라 부산을 떤다. 지신을 꼭꼭 밟아 달라며 대청마루에 쌀 한 되가량 포대기에 담아 상 위에 얹어 놓는다. 부엌, 뒤주, 곳간, 소 마구간, 우물, 곳곳에는 한 그릇씩 불룩 담아 놓고 기다린다. 지신밟기 풍물패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린다. 어머니는 삽짝 밖을 내다보며 머리를 기웃거린다. 행여나 우리 집에 먼저 오지 않고 다른 집에 먼저 갈까 조바심이 난다.

한해의 기운을 담뿍 담은 북소리가 쿵쿵거리며 우리 집 삽짝을 열고 들어온다. 어머니는 버선발로 뛰어나가 합장하며 반갑게 마중한다.

상쇠가 앞장서고 징, 장구, 북, 상모 쓴 풍장 패들이 뒤따라 들어온다. 활기찬 발걸음으로 마당 한 바퀴를 횡 돌며 한바탕 신나게 논다.

그러고 나서 푸짐하게 차려놓은 술과 떡국 등을 맛있게 먹는다. 찹쌀로 빚은 술 한 잔 기울이면서 풍장 패들은 옜다 모르겠다, 한잔하고 신나게 놀아 보자며 판 위에 있는 술 한 동이가 맞바람에 게 눈 감추듯 금방 동이 나버렸다.

상쇄가 앞장서서 풍년 농사 되어 달라며 밝은 목소리로 농사 풀이한다. 잇따라 아들딸 많이 낳아 자손만대 번영하소. 하며 자손 풀이 등 다양한 덕담을 한다.

동네 사람들도 한데 어울려 덩실덩실 춤추며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한다.
흥이 난 풍장 패들이 쉴 사이 없이 쌀을 한 그릇씩 담아 놓은 곳을 찾아다니면서 굿판을 벌인다. 마지막으로 대청마루에 올라가 한해를 태평하게 잘 보내 달라고 삼신한테 빌고서는 삽짝 밖으로 나간다.

어머니는 상기된 얼굴로 풍장 패들의 뒤를 보며 합장하여 연신 허리 굽혀 절한다. 자식이 뭐길래 저토록 정성을 다할까?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양주동 ‘어머니의 마음’ 노래 가사 중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감격의 눈물이 앞을 가린다.

저희를 애지중지 여기시며 키워주신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어머님 은혜 갚을 길 없어 하늘나라에서 친구분들 앞에서 자식 자랑하시며 잘 지내시라고 걱정 없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 올해는 부를 일궈주는 해라고 한다. 부를 꿈 꾸며 처음으로 소 경매장에 갔다.

경매장에는 300여 두가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몇 바퀴 돌아보아도 마음에 드는 소(牛)가 없어 다음 경매일 장에 갔다. 그날따라 마음 든 소가 많이 나왔다. 50여 마리가 소 우리를 가득 메웠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는 말이 있다. 풍장 패들이 한바탕 신나게 떠들고 간 자리에는 침묵과 고요가 잔잔히 흐른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인지를 생각하며 명상에 잠겨 본다. 욕심 없이 하는 만큼 주어지는 삶을 살고싶다.

그래서인지 힘들어 사드린 소들이 탈 없이 무럭무럭 잘 커 주고 있어 끝도 좋을 거라 조심스레 믿어 본다. 신경 썼던 일들이 복잡한 머리에서 하나둘씩 빠져나간다.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신나는 풍악 소리에 맞춰 덩실덩실 춤추며 불그스레 힘차게 떠오르는 동녘 하늘을 바라보며 새해 소망을 간절히 빌어본다.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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