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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하얀 연탄재”

admin 기자 입력 2024.03.04 11:24 수정 2024.03.04 11:24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분주한 가을을 이제 막 끝낸 들녘에 고요한 적막이 흐른다.
산기슭 외로운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긴 꼬리를 달고 뭉게구름같이 뭉실뭉실 하늘 높이 피어오른다.

늦가을 바람에 흩어졌다 뭉쳤다 하며 아름다운 향연을 펼친다.
늦가을 찬 바람은 한겨울 바람보다 더 차갑고 매섭다. 사람들은 몸을 움츠리며 겨우내 땔 땔감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갈비, 장작, 아카시나무 뿌리며, 공장에서 나오는 나무 조각, 연탄 등 비를 맞지 않는 곳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그중에 연탄이 제일이다. 취급하기 편리하고 불을 한 번 지펴 놓으면 오래가기 때문이다.

유럽속담에 “토마토가 빨갛게 익으면 의사 얼굴이 파랗게 된다.” 토마토에는 비타민C· E가 풍부하고 뼈 건강과 소화 불량, 변비 예방 등과 효능이 많아 토마토 익어가는 계절에는 사람들이 토마토를 많이 먹으므로 환자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대동물을 주로 진료하는 나 역시 겨울이면 얼굴이 파랗다. 겨울에는 진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직업의 만족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없을 경우도 있을 거로 생각한다.
내 직업의 경우 허우대는 멀쩡하면서 속이 텅 빈 극한 직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이 수의사는 희망적인 직업이라 해서다.
우여곡절로 수의사란 직업을 가지고 여기까지 온 건만도 천만번 다행이라 생각한다. 수의사는 정신적 육체적 위험뿐만 아니라 때로는 생명까지 위협받는 직업이다. 가축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탄저 등 각종 예방 접종을 한다.

이때마다 신경이 곤두서고 걱정이 된다. 소 마구간에는 소 잠금장치가 있는 우사도 있고, 없는 우사도 있다.

장치가 있는 우사는 마구간 밖에서 주사 놓을 수 있어 걱정이 없는데 장치가 없는 우사는 마구간에 들어가서 주사를 놓아야 한다.

성질이 사납고 괴팍스러운 소는 뿔을 들이밀며 매섭게 공격한다. 잘못하면 큰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내 인생 평생 결코 잊을 수 없는 아찔했던 순간이 있었다. 예방 접종하던 중 소 뒷발에 걷어차여 공중으로 부~ 응 떠 소똥 위에 그대로 떨어졌다. 숨이 턱 막히고 정신을 잃었다.

그 위로 소가 나를 밟고 지나갔으면 지금쯤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 글을 쓰지 못하고 영영 볼 수 없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을 거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몸서리쳐진다.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얼마인가 앞이 희미하게 보인다. 손가락을 까딱해 보니 움직여진다. 하느님! 불쌍한 저희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똥투성이 된 내 몸을 일으켜 주신다.

할딱거리는 숨을 몰아쉬면서 가슴을 움켜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온몸이 소똥으로 뒤범벅된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허탈과 좌절, 슬픔과 쓰라림이 한꺼번에 밀어닥친다. 세상에 둘도 없는 영광스러운 내 직업에 대한 상실감과 회의감을 감당할 수 없다.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싫었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있다. 그대로 믿으며 살고 싶지만 앞으로 또 어떤 다른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순간에 하루빨리 여기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면서 떳떳하게 살고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좌절하고 포기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구신 떡달이 같은 겉만 번지르르한 명성을 벗어던져 버리고 새로운 각오로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 나선다.

돼지 붐이 한창 일어날 때였다. 인생에 기회는 세 번 찾아온다고 한다. 이번 기회가 내 인생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빚을 내서라도 돼지를 키워 보고 싶었다.

화려하지도 못하면서 그럴싸하게 보인 간판을 걸어놓고 어렵게 사는 것보다 힘들어도 걱정 없이 넉넉한 삶을 사는 것이 훨씬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세상은 정말 고약하고 얄궂다.

내가 어렵게 사는 속사정도 모르면서 번지르르한 겉만 보고 잘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 같아 마음이 아팠다. 돼지를 키우려 한다고 세상 사람들이 똑바로 보지 않고 삐딱하게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이다. 질투, 시기, 비방 등이 날개 치는 요즘 세상, 귀 기울여 새겨들을 거 하나도 없었다.

돼지를 키우기로 결심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500여 평 되는 밭이 있다.
돼지 수십 마리 키울 수 있는 돈사(豚舍)가 있어 어렵사리 샀다. 임신한 암퇘지 열 마리를 샀다.

정성을 다해 아침저녁으로 보살펴 주면서 꿈을 키웠다.
돼지는 분만기가 다가오면서 하루가 다르게 배가 점점 불러온다. 배가 불러 엉덩이를 삐딱거리며 힘들어 걷는 모습을 보면서 애잔한 정이 간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힘들지만 잘 견뎌내어 새끼를 주렁주렁 많이 낳아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처음으로 돼지 새끼를 받아 보는데 어려움 없이 순산을 잘해 주기를 바라며 두 손을 꼭 잡는다. 잠시 순간 불안했던 마음이 누그러지고 한 가닥 삶의 희망이 보이고 마음이 설렌다.
큰 돼지들은 말썽 없이 잘 커 주었다. 여느 날 열 마리 중 한 마리가 새끼를 낳는다. 꼬물거리는 새끼를 받아 타올로 코와 온몸을 닦아 준다. 벅찬 기쁨이 물밀듯이 밀어닥친다.

할딱거리는 새 생명의 숨소리에 신비를 느끼며 찌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며칠 사이 열 마리 돼지가 새끼를 모두 낳았다.

똥 단지 같은 새끼가 100여 마리가 오물거린다. 희망의 새 세상을 꿈꾸며 하얀 밤을 돼지 새끼들과 같이 돼지우리에서 보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새끼들은 천지도 모르고 꼬리를 꼬불꼬불 감아올리고 삑삑 소리 지르며 뛰노느라 정신없다. 사람이 다가가도 모른다.

어느 한 날은 옆 밭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이 구경하러 몰려든다. 텁텁한 막걸리 한잔하며 그동안 일어났던 자질구레한 이야기 하며 시간 간 줄 몰랐다. 그동안 고생했다며 한마디씩 하신다.

동네 사람들의 따뜻한 격려에 지난날 씁쓸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새끼는 이른 봄 나뭇가지에 물오르는 듯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란다. 운동장만 하던 돼지우리가 손바닥만 하게 작아졌다.

새끼들은 비좁다고 삑삑거리며 아우성이다. 없는 밑천에 걱정거리가 또 생겼다. 돼지우리를 크게 지어야 했다. 오만가지 법 중에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돼지우리 바로 밑에 사람 키 한 질 이상 낮은 백여 평 되는 복숭아밭이 있다. 이 밭을 메우면 될 것 같아 약간의 희망을 가졌다.

그럼에도 빚을 내어 밭과 돼지를 겨우 샀는데 또 빚을 내어야 한다니 엉기(진절머리 경상도 방언)가 나서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궁리 끝에 건축 폐기물처리장 사무실을 찾았다. 폐기물은 그냥 주는데 차량 운반비가 1대당 80,000원이라고 한다.

엄청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걱정만 쌓인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을 뒤척이며 밤을 지새우길 하루 이틀 아니었다.

여느 날 어슴푸레한 여명이 밝아올 무렵 길옆에 있는 작은 집 처마 밑에 겨우내 사용하고 난 하얀 연탄재를 수북이 쌓아 놓은 것을 본 기억이 떠오른다. 주인한테 물어보고 쓸데없다고 한다면 연탄재로 메우면 될 것 같은 생각에 실낱같은 희망의 빛이 보였다.

그럼에도 고민과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힌다.
주인이 연탄재를 준다 해도 어떻게 실어 날아야 하나? 장비라고는 젊음의 패기와 용기 그리고 며칠 전에 구입한 쏘나타 승용차가 전부다. 새끼는 점점 커가고 옮길 장소는 마땅찮고 어쩔 수 없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나에게 승용차는 이제 진료하기 위한 교통수단이 아니고 연탄재를 실어 나르는 쓰레기 청소차로 편리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수의사란 직업에 연연하지 않고 얼굴에 철판을 깐 철면피가 되었다. 얽히고 얽힌 사연으로 고민도 많았지만, 훌훌 털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칼바람이 쌩쌩 불어대는 겨울 새벽 3시에 일어난다. 눈만 빠끔히 보이는 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목장갑에 빳빳한 고무장화 신고 차를 몰고 어젯밤에 생각했던 그 집으로 간다. 깊은 밤중이라 동네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다.

엔진 돌아가는 소리에 잠에서 다 깰 것 같아 신경이 쓰인다. 겨우겨우 주인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나는 내 마음만 믿고 밤중이라 주인한테 물어보기도 그렇고 해서 날이 새면 연탄재를 가져갔다고 이야기하면 될 거로 생각하고 가슴 두근거리며 한 장 두 장 실었다.
갑자기 방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고 불빛이 창문 사이로 새어 나온다. 깜짝 놀라 숨죽여 꼼짝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머릿속에 불안한 생각이 번개같이 스친다.

주인이 쓰려고 모아둔 연탄재를 한 번 잃어버렸던 적이 있었든지 연탄재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도둑으로 몰릴까 봐 벌벌 떨면서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방구석에 우두 켜니 앉아 방금 일어났던 일을 되새겨 본다. 주인이 고발하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겁에 질려 며칠 동안 밖으로 나가질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사그라진다.

되지도 않은 억지를 부리며 연탄재를 아무 데나 버릴 수 없어 쌓아 둔 연탄재를 치워주면 고마워하겠지? 하며 내 편한 대로 생각을 하면서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부질없는 철부지 한 생각이 나를 이토록 마음의 상처를 줄 줄 꿈에도 몰랐다.

며칠 후 그 집 주인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도둑이 제 발에 질리는 듯 지레 겁먹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떨리는 음성으로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주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스럽게 대답한다. “연탄재를 버릴 데 없어 애를 먹고 있는데, 추운 날씨에 누가 연탄재를 가져가는지 고마워 알아보았습니다. 원장님이 가져가셨다기에 인사하려고 찾아왔다”고 한다. 긴장된 마음을 풀고 말 못 할 사정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듣고 그 집 주인은 동네에 이야기해서 연탄재를 가져가기 쉽도록 한곳에 모아 두겠다고 하고 돌아갔다.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을 찾아와서 인사한다는 것이 도리어 내가 미안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캄캄한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했던 일을 어떻게 알았든지 세상이 무서웠다.

그 후부터 마음 놓고 그 집 연탄재를 가져오게 되었다. 연탄재를 실어서 넣는 만큼 밭은 메워진다.

잘 달리는 말에 더 잘 달리려고 채찍질하는 것처럼 욕심이 끓어오른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메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정에서 나오는 연탄재, 생활 쓰레기 등을 미화원이 리어카에 실어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을 보고 연탄재를 따로 모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흔쾌히 해 주겠다고 한다.

인심을 잃지 않고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연탄재를 가지러 집집이 다니는 것보다 한곳에 모아 놓으며 일손도 덜뿐더러 한꺼번에 많이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부탁했다.
덕분에 수월하게 많은 연탄재를 실어 날랐다. 이마에 흘러내는 구슬땀 훔치고 허리를 펴 눈가는 데까지 밭을 휙 둘러본다. 밭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살다 보면 잡다한 일이 많이 일어날 수 있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어느 날 아침, 겨울이라 하지만 이렇게 추운 겨울 난생처음이다. 냇가에 얼음이 꽁꽁 얼고 처마 끝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휘몰아치는 매서운 찬 바람에 한 발짝도 뛰기 힘들다.

얼굴과 귀가 얼얼하고 손이 꽁꽁 얼어서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는다. 콧구멍이 막혀 숨이 턱턱 막힌다. 혹독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미화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른 새벽부터 연탄재와 생활 폐기물 등을 한곳으로 모은다. 한 날은 미화원과 따뜻한 떡국을 같이 먹고 싶어 음식집에 들렀다.

이것이 동료들의 귀에 들어갔던지 시끌시끌하다는 소문이 들린다. 원만히 수습되었지만, 따뜻한 정을 베풀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되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새삼 세상인심을 돌아보았다.

지난 일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다시 집집이 다니면서 연탄재를 실어 날랐다. 조금 힘들지만,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실어 나를 수 있어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세상 물결 흐르는 데로 따라가며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거 없었다. 세상이 변하는 만큼 나도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젠 연탄재 실어 나르는 것이 일상화처럼 되었다. 처음에는 부끄럽고 서먹서먹했다.
얼굴도 두꺼워졌고 비위도 조금 늘었다. 막다른 골목길은 사람을 무섭게 변하게 하는 마력이라도 있는 것 같다. 나도 많이 변했던 것 같다.

처음에 승용차 뒷좌석에 비닐 깔고 연탄재를 실어 날랐다. 각박한 세상에도 마음씨 좋은 사람도 있었다. 보기엔 멀쩡한 것으로 보이는 리어카를 공짜로 주기에 너무 감사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리어카를 깨끗이 손질해서 자동차 뒤 트렁크 잠금장치 고리에 리어카를 매달아 고정했다.

승용차에 리어카를 매달아 연탄재를 실어 가기는 처음이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운전해 보았다. 뒷좌석에 연탄재를 싣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고 한꺼번에 더 많이 실어 나를 수 있어 좋았다. 며칠 후 잠금 고리가 흔들흔들해서 철공소에 갔다.

철공소 사장이 찾아온 이야기를 듣고 기겁한다. 큰일날 뻔했다며 한 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서성거리며 흥분한 어조로 말한다. “자동차가 앞으로 달릴 적에 리어카를 당기는 힘이 50이면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는 100이란 힘을 받아내려 갑니다. 조금만 더 타고 다녔으면 잠금 고리가 떨어져 리어카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리어카가 뒤따라온 자동차와 충돌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대형 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하느님이 돌봐 주셨다면서 아찔한 순간을 피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용접은 할 수 없다”라고 한다. 용접할 수도 없고, 용접해서도 안 되는 곳입니다.라고 딱 잘라 말한다. 청천벽력 같은 말에 어찌할 수 없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어 처음 시작할 때처럼 연탄재를 트렁크와 뒷좌석에 실어 나른다. 여느 날 도롯가에 속이 꽉 차 보이는 포대기 여러 개가 기다랗게 줄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선뜻 가져오고 싶어도 포대기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어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누구에게 물어보려고 두리번거려도 이른 새벽에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포대기 입구를 조심스럽게 조금 열어 보았다.

하얀 연탄재가 포대 안에 가득했다. 누가 연탄재를 포대기에 담아 청소차가 실어 가라고 도롯가에 내놓은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 놓고 실어 갔다.

한꺼번에 이처럼 많은 연탄재를 실어 날라 본 적이 없었다. 손발이 꽁꽁 얼고 터지고 해도 오늘만큼 신난 날이 없었다.

운이 참 좋은 이른 아침이었다.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그 사이 연탄재와 만난 시간이 꽤 오래된 것으로 생각한다. 연탄재와 인연을 맺으면서 세상을 알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과 친해지기도 했다. 이제는 하루도 그 집 연탄재를 가지러 가지 않으면 마음이 허전하고 꼭 무언가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 집 주인도 오늘은 왜 안 가져갔지? 걱정해 준다. 마음을 주고받고 하는 사이 연민의 정이 차곡차곡 쌓여 간다.

그래서 세상은 참혹하고 잔인하게 변하여 가도 사람들은 따뜻한 정 나누며 화목하고 평화롭게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믿어 본다.

연탄재 가지러 가는 집이 한 집 두 집 늘어난다. 어떤 때는 이른 새벽부터 해뜨기 전까지 모두 실어 나르지 못해 애를 먹을 때도 있다. 낑낑거리며 땀 흘려도 힘들거나 짜증 나거나 싫지 않았다. 그냥 신바람이 마구 난다.

사람의 마음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하면서도 때로는 얄궂을 때가 있다. 겉은 희멀겋게 해서 연탄재를 실어 나르는 거를 보고 한 마디씩 내뱉는다. 때론 겁이 날 때도 있었다. 힘자라는 데까지 일하도록 내버려두면 얼마나 좋으련만, 무엇이 그리도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막다른 골목길에 들어선 나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콩을 팥이라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심코 지나가는 나를 보면서 사람들은 비웃는 듯 말한다.
연탄재 실어 나르는 전문가가 다 되었다며 놀린다. ‘하얀 연탄재’라는 별명까지 붙어준다. 같잖기도 해서 지나온 기억을 되돌려 본다. 처음 연탄재를 들었을 때 연탄재 가루가 옷에 묻을까 봐 쩔쩔맸다. 어떤 때는 연탄재 가루를 뒤집어쓰고 말 그대로 넝마주이와 똑같았다.

이제 와 숙련된 모습으로 다루는 것을 보고 전문가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진실이었지만, 말에는 ‘아 와 ‘어’가 다르듯이 같은 말이라도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내용이 다를 수 있다. 한 번 지은 별명은 잊히지 않는다. 어린 꼬맹이들도 지나가면서 나를 보고 “하야 연탄재” 아저씨라 부른다.

천진한 어린것들의 꾸김살 없이 지껄여 대는 말에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겨울비가 밤새 추적거린다. 퍼석퍼석하던 연탄재가 빗물에 얼어붙어 얼음덩어리가 되었다.
빙판 도로는 새벽 가로등 불빛에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인다. 얼음 위에 운전하는 건 위험천만이다.

여느 때와 같이 연탄재를 가득 싣고 가슴 조이며 천천히 도로 위로 올라간다. 차는 조그마한 턱을 넘어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헛바퀴 돌기 시작한다.

날이 밝기 전에 다 실어 날라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해진다. 한자 되는 코를 훌쩍 들이마시며 꽁꽁 언 손을 호호 불며, 있는 힘 다한다. 간신히 빠져나와 도로 위에 올렸다. 입술이 바싹 마르고 이마에 진땀이 흐른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겨우 밭까지 운전해 갔다. 작은 별들이 새벽의 어둠을 밀어내느라 꿈틀거린다.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어저께는 여태까지 실어 날 났던 연탄재를 부수고 물 뿌리고 고르고 하느라 녹초가 되었다. 좀 더 쉬고 싶어도 장날이라 평일보다 더 빨리 일어나야 한다. 녹초가 된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해서 겨우 일어난다. 창밖을 내다본다.

시내버스가 장 보러 오는 사람들을 짐짝처럼 태워 장 입구에서 빵빵 소리 지르며 서 있다. 하얀 연탄재가 도로 위에 가득하다.

날이 밝기 전에 다 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진다. 젖 먹은 힘 다해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집에 들어와서 푹 쓰려졌다. 큰 돼지우리를 짓기 위해 잠시도 쉴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다시 오뚝이가 되어야 했다.

일요일은 환경미화원이 쉬는 날이기 때문에 월요일 새벽은 생활 쓰레기, 폐지, 연탄재 등이 주중에 비해 두세 배나 많다.

해뜨기 전에 연탄재를 다 실어 날라야 할 텐데 다 실어 나르지 못할까? 봐서 걱정이다. 그럼에도 월요일은 신난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연탄재를 차 뒤 칸에 가득 실어 나르는 기분은 나의 젊음을 한층 더 젊게 해 주는 것 같아 너무나 즐거웠다.

하루는 도로에 연탄재가 하나도 없었다. 미화원이 감기에 걸려 나오지 않았을까 봐 걱정되어 전화를 해보았다. 도로에 연탄재를 모아 놓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지저분하다고 해서 어쩔 수 없어 모아 두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에, 어찌 이를 수가!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다? 연탄재를 날이 밝기 전에 실어 나르고 그 자리를 빗자루로 거울 알같이 쓸어 놓았는데 무엇이 부족해 또 하던 일을 못 하게 하는지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지 세상은 참말로 요지경 세상이다. 은근히 속상했다.

우리는 낯선 사람이라도 매일 같이 보고 만나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레 친숙해진다. 연탄재를 가져가기 쉽도록 차곡차곡 쌓아두는 단골집이 한 집 두 집 생겼다.

서로가 얼굴도 모르면서 마음속으로 인간관계의 정이 쌓인 것이다. 식당에서 나온 연탄재가 많은 날이면 손님이 많았구나! 마음이 즐겁다. 적은 날이면 마음이 우울하다. 서로가 도와주며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오늘 새벽도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치게 됨을 감사히 생각하며 하루를 마치곤 한다.

오늘은 겨울 날씨답지 않게 푸근하다. 청소해야겠다고 차 안을 들여다본다. 귀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차를 한 번도 청소해 본 적 없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너무 심했다. 악취가 코를 찌르며 하얀 연탄재 가루로 엉망진창이다.

여태까지 어떻게 차를 타고 다녔는지 궁금하다. 한때는 청결하고 깨끗하다고 소문까지 났는데 믿기지 않는다. 처음 시작할 때는 연탄재 가루가 차 안에 조금만 떨어져도 털고 닦고 했던 나였다. 이제 와 예사로 보이니 힘들어 만사가 귀찮아졌는지 걱정이 된다. 트렁크 안과 뒷자리와 조수석에 새로이 비닐을 두껍게 깔았다.

어느덧 봄이 하품하며 기지개를 켠다. 봄이 오기 전에 연탄재로 넓은 밭을 메꾸어 보겠다고 생각했던 꿈이 이루어졌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지난 기억을 더듬어 보면, 꿈같다.

처음 연탄재를 실어 나를 때만 해도 어색하고 남사스러워 얼굴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지칠 줄 모르고 연탄재를 실어 나르다 코피가 펑펑 쏟아지는 일도 있었다. 과로에 지쳐 쓰러지기도 했다. 손발이 꽁꽁 얼어붙어 감각을 잃어버리고 며칠간 옴짝달싹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모진 세월을 버텨가면서 잘살아 보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살아온 것이 오늘의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었다.

하얀 연탄재로 다듬은 눈물 어린 땅. 백여 평 되는 자리에 궁전 같은 돼지우리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 속에 돼지 500여 두가 시끌시끌하다. 피나는 노력 끝에 얻은 영광에 하늘을 우러러보며 난 부자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다! 라고 양손을 불끈 쥐고 소리 높여 외쳤다. 이젠 겨울이 와도 겁 나지 않는다. 입술도 새파랗게 질리지 않는다. 세상에서 “하야 연탄재”보다 더 값비싼 보석은 없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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