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인물 독자마당

시인 백석과 비운의 여인 자야(子夜)

admin 기자 입력 2024.03.21 10:53 수정 2024.03.21 10:53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시인 백석(白石)과 기생(妓生) 자야(子夜)의 사랑 이야기는 슬프다. 백석은 1912년 평북 정주 출생으로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백석은 필명이다.

그는 1930년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란 단편 소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등단했다. 이를 계기로 1934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1936년 시집 ‘사슴’을 출간했다.

그는 문학에 천재적 재능과 빼어난 외모로 당시 뭇 여성들이 연모하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가 길을 지나가면 뭇 여성들이 그를 보고 넋을 잃었을 정도의 미남이었다고 한다. 알랭 들롱보다 훨씬 잘 생겼던 모양이다.

그런 백석이 기생 ‘자야’와의 러브스토리는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만큼 듣는 이의 가슴이 찡하게 아려온다.

백석이 사랑한 여인 ‘자야’의 본명은 김영한(金英韓)이다. 함흥의 쇠락한 양반가의 딸로 열여섯 살부터 요정의 기생이었다.

당시 그는 절세의 미모와 춤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 소문을 듣고 찾아온 시인이자 함흥 영생고보 영어 선생이었던 백석과 첫 만남에서 눈이 맞았다.

백석은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자야’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다”라는 말을 했다.

백석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五歌’에 나오는 여인의 이름 ‘자야’라는 애칭을 김영한에게 지어줬다고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가 사랑하는 연인 사이가 되었다. 이 만남이 슬픈 사랑의 운명이 시작되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나.

이들은 1938년 서울 종로 청진동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장벽이 생겼다.
조선일보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에다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였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강제로 다른 여자에게 결혼시켜 둘의 사랑을 갈라놓았다.

동거 28일 만에 사랑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백석은 강제결혼 첫날 밤에 ‘자야’에게로 도망쳐 돌아왔다.

그리고는 ‘자야’에게 만주로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렇지만 ‘자야’는 부모가 염려하듯이 백석의 장래를 망치게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백석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나 백석은 ‘자야’가 자신의 제안을 따를 것으로 확신하고 만주로 떠난다. 떠나기 전 경성에 있을 때 유명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를 발표했다. 그야말로 절창이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웅앙웅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이다

백석은 ‘자야’와의 순수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이루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더럽다고 생각하면서 현실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깊은 사골 ‘마가리’ 즉 오두막집 같은 세속과 단절된 공간에서의 삶을 꿈꾼다.

그리고 지신의 기대에 부응할 것이라는 믿음을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웅알웅알 울 것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1940년 백석이 만주로 떠난 이후 자야는 기생 일에 전념했고 1953년에 설립한 대원각을 거물급 요정으로 키웠다.

속담에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다. 평생 백석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살았던 자야는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의 회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비련의 여인으로 1999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 당시 천억이 넘는 대원각을 아무런 조건 없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수행 도량 길상사를 거듭나게 한 여장부다.

그의 소원은 “이곳 팔각정에서 그 사람과 내가 함께 들을 수 있는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기원한다”라고 말했다. 그 대원각이 바로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지금의 절 길상사吉祥寺다.

그녀에게 천억대가 넘는 대원각 재산을 시주하던 날 ‘아깝지 않습니까? ‘라는 기자의 질문에 자야는 “천억이란 재산도 백석 그 사람의 시 한 줄 만도 못하다”라고 말했다.

백석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또 “내가 죽으면 화장해 눈 내리는 날 길상사 뒤뜰에 뿌려달라”고 했다.

그의 유언처럼 그리되었다. 사랑했던 사람, 백석의 시에서처럼 눈이 푹푹 내리는 날 백석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 같다.

다비식을 마친 뒤 ‘자야’ 김영한의 뼛가루는 길상사 경내 쌓인 눈 위에 하얗게 뿌려졌다. 산 새도 설게 울었지 않았을까.

백석은 해방이 되자 ‘자야’가 있는 서울로 오지 않고 북한 정주로 돌아갔다. 그건 월남하면 가족 신변에 끼칠 폐해 걱정, 북한 당국의 감시 탓으로 추정된다. 북한에 돌아간 백석은 자의에 반하는 북한 체제를 선전 선동하고, 김일성을 찬양하는 일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북한에서 발표한 문학작품으로는 시 ‘나루터’를 비롯해 수필과 아동문학 등 불과 54편에 불과했다. 어용 문학단체의 활동도 어영부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천재 시인 백석을 1959년 평양에서 추방했겠나. 만년에 국영협동조합에서 양치기 일을 하는 등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 1996년 1월 7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석은 분단과 국적을 넘어 오로지 문학으로만 살았어야 할 천생 시인이다.
광복 후 남한으로 돌아왔으면 그토록 사랑하던 ‘자야’의 만남도, 사랑의 보금자리도 마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되었으면 그의 뛰어난 문학성을 마음껏 발휘하여 한국문단에 빛나는 금자탑을 세웠을 것이고 하는 아쉬움이 절절하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구처럼 가없는 연인이 우리 곁을 떠났으나 우리가 그리워하는 이름들에 대한 사랑은 오래도록 멈출 수가 없다.


황성창 시인
재부군위군향우회 자문위원


저작권자 N군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