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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나무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admin 기자 입력 2024.04.17 22:26 수정 2024.04.17 10:26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아버지는 나무를 사랑하신다.
6.25 한국전쟁 후 먹거리와 땔 나무마저 모두 부족해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야산은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민둥산이었다. 사람들은 나무하러 20여 리 떨어진 먼 산길을 따라 깊은 산까지 가야했다.

겨울이면 그 산길은 지게 지고 가는 사람들과 소 몰고 가는 사람들이 한데 뒤섞여 장사진을 이뤘다. 그 속에서 나는 아버지 뒤따라 소 몰고 나무하러 갔다. 새벽밥 먹고 나서 돌아오면 어둠이 내려앉았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아버지는 새벽밥 먹고 나무하러 갈 준비를 하셨다.
바가지에 쌀 몇 톨 섞인 밥을 싸서 소 길마 위에 단단히 묶는다.

나무를 할 낫과 톱 등 연장을 지게에 담아 걸머지고 부지런히 걸어가셨다. 소들이 지나간 길 위에는 소똥 오줌 뒤범벅이 된다.

거기에 먼지를 뒤덮어 쓴 내 얼굴은 매란 없다. 눈만 빠끔하다.
열심히 나무를 하는데 아버지가 나무를 하면서 알아듣지 못한 말로 중얼거리셔서 무슨 말씀하시는지 뒤돌아보았다.

우거진 숲속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고 누리 무리하게 자란 어린 소나무를 보고 “햇빛을 보지 못해 죽어가는구나! 불쌍한 것들” 하시며 주위에 있는 억새를 낫으로 깨끗이 베어주셨다. 웅크리고 앉아 있던 어린 소나무들이 한참 만에 고개를 들고 파란 하늘을 쳐다봤다.

아버지가 나무를 벤 자리를 보면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가 여기에서 나무를 했구나!’ 한 것을 금방 알아맞힐 정도로 아버지는 나무를 사랑하셨다.

늦가을 어느 날 온 식구가 둘러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동네에서 나보고 산감독을 맡아 달라고 한다.”며 식구들의 얼굴을 살피시면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세상물정 모르고 조용하게 살던 우리 집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말씀에 모두 의아했다.

“농사밖에 모르는 당신이 그런 감투를 쓸 자격이 됩니까?” 하고 아버지 표정을 읽으시며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조곤조곤히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극구 반대에도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듣고 계셨다. 아버지의 마음은 벌써 꿩이 되었다. ‘몸은 산에 있고 마음은 콩밭에 있었다’ 어수선한 이 순간에도 골이 깊게 팬 아버지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가득하셨다.

아버지는 순진함과 정직함, 겸손함을 미덕으로 삼고 살아오셨다.
산감독이란 붉은색으로 굵직하게 세긴 세 줄로 된 완장을 차고 산림을 감독하면서 숨을 헐떡이며 가파른 산을 오르내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어린 눈에도 아버지의 모습이 자랑스러웠고 당당하게 보였다.

아버지는 산감독이 된 것을 크나큰 감투라고 생각하고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겼다. 아버지가 산감독이 되신 후 어떻게 하면 민둥산을 울창한 숲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늘 고민 하셨다. ‘두드리면 문이 열린다’는 말 있듯 하늘이 도우셨다.

산감독이 되신 그 이듬해 민둥산에 산림녹화를 한다며 사방사업이 국책사업으로 시행되었다. 우리 동네에도 사방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산에 오리나무를 심는다는 말에 제일 신바람 난 사람은 우리 아버지셨다.

전쟁 후 먹을거리가 변변치 못해 힘들게 살아온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리나무를 심으러 나오면 하루 일당을 준다는 말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린 애까지도 나무 심으러 나왔다.

신이 난 아버지는 완장을 차고 이른 아침부터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나무 심으러 나오라며 독려하셨다.

한 조를 열 명씩으로 일렬로 서서 긴 새끼줄에 표시한 눈금 따라 오리 묘목을 심었다. 묘목을 심어 보니 수월한 것 같아 재미있다고 하면서 모두 좋아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힘이 빠지고 지치기 시작했다. 싫증도 나고 하기 싫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럼에도 묘목을 심어야 일당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진퇴양난이었다.

사람은 때론 무서운 요물로 돌변하기도 한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불장난도 서슴지 않는다. 한 날은 또래끼리 모여 꾀를 부렸다. 하루 심을 묘목을 다 심으면 하루를 마치기 때문에 구덩이를 커다랗게 파 놓고 그 속에 묘목 20개를 한 다발로 묶어 놓은 단을 한 구덩이 묻어버리자고 모의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 처음 몇 번은 별 탈 없이 잘 넘겼다.

어느 날 감독에 걸렸다. “하기 싫거든 나가라.”라며 불호령이 내렸다. 쫓겨날 지경이 되었다. 한 번만 용서해 달라며 애걸복걸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수개월 동안 묘목을 심으러 다녔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큰 대과없이 사방공사는 무사히 마쳤다. 몇 해 사이에 헐벗었던 산이 몰라보게 변했다. 오리나무는 상상외로 성장이 빨랐다. 푸른 산이 마치 오리나무 천국 같았다.

오리나무는 불을 지피는 화목 거리에 불과하지만, 민둥산이 푸른 산으로 만드는데 이보다 더 좋은 나무는 없었다. 사람들은 땔 나무가 없어 걱정되었던 고민을 풀고 약간의 여유로움을 가지고 어려웠던 그때의 삶을 다독이며 서로의 마음을 감싸주고 위로했다.

아버지는 담뱃대를 입에 물고 손을 뒤로하고 창밖을 내다보시면서 지난 일들을 회상해 보셨다.

풀 한 포기 없든 민둥산이 울창한 숲으로 변한 것을 보시면서 흐뭇한 마음으로 긴 담뱃대에 불을 댕기셨다. 여린 마음에 세상이 변해도 나무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마음은 영원토록 빛날 것이라고 조심스레 믿었다.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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