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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순례기山寺巡禮記

admin 기자 입력 2024.05.19 22:49 수정 2024.05.19 10:49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지난달 마지막 토요일 사찰 순례길에 올랐다. 팔공산악회 월례 산행의 일환이다.
등산 대신 재부 군위군 의흥 출신 스님 두 분이 주지로 주석하고 있는 ‘관음정사’와 범어서 말사 ‘청량사’를 순례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한두 차례 두 주지 스님을 만난 적은 있으나 산악회에서 방문하기는 처음이다.
지난해 12월 청량사 현엽 스님의 초청으로 10여 명이 청량사를 방문, 법문도 듣고 맛집에서 점심 대접을 받았다. 그때 산악회 정례산행을 겸해 고향 사림들이 한번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의 실천으로 오늘 산사 순례길에 오르게 되었다.

우리 부부도 사찰 순례길에 동행했다. 동래역에서 서면에서 25여 명이 탑승한 차량이 사하구 감천마을 ‘관음정사’를 향해 출발했다.

영주동 지나 토성동 부산대병원 담장을 끼고 ‘아미동 비석마을’ ‘까치 고갯길’로 들어섰다. 비석마을은 일제 시 일본인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 6·25 피란민과 판잣집 철거민들이 묘지의 비석을 주춧돌로 사용해 집을 지어 살았다 해서 ‘비석마을’이라 불렀다.

이곳을 지나면서 50~60년대 아미동 산비탈에 살던 판자촌 풍경이 떠올라 잠시 감회에 젖었다. 그 사이 관광버스가 감천마을에 도착 그때가 11시다.

주말이라 감천문화마을 안내소 입구부터 관광객이 몹시 붐볐다. 안내센터 부근에 내리자 우리 일행을 맞이해주는 노신사의 안내로 관음정사에 도착, 보살의 안내로 법당에 들었다.

언제나 절에만 오면 불교식 절하기가 어렵다. 합장 자세로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손을 앞으로 내어놓는 동작이 이 나이에도 어설프고 허둥댄다.

모두가 법당에 앉자 보우 스님은 찾아와 준 고향 선후배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건넸다.
이어서 이곳 감천문화마을의 유래를 감천문화마을 주민협의회 전 회장에게 직접 설명해주기를 부탁하고 마이크를 넘겼다.

감천문화마을 손판암 회장은 여느 해설사 못잖게 감천문화마을의 형성과정을 설명했다.
6·25전쟁 피란민들과 1955년에 일어난 부산 대화재를 피해 태극도 신도들이 집단이주해 정착했다.

이후 태극도 신도들이 4000여 명이나 살았는데 한때는 신도가 무려 10만 명을 넘었다.
신도들은 마을을 건립할 당시 산비탈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해서 ‘앞집이 뒷집에 햇빛을 가리게 해서는 안 된다’며 조망권 원칙을 세웠다. 천마산 옥녀봉 비탈진 산 중턱에 계단식으로 구성된 마을 풍경이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진기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부산에서 대표적 고지대 달동네로 낙후된 지역이었다.
그런 마을을 젊은 예술가들과 벽에 낙서처럼 그림 그리는 작가들이 힘을 합치면서 관광명소로 뜨기 시작했다. 원주민이 사생활 침해를 걱정할 만큼 모여든 관광객들이 사진을 마구 찍어댔으니 주민들 불만이 오직 많았겠나.

부산의 마추픽추라는 별명의 도시로 변모하자 2013년에는 미 CNN 방송에서 아시아 관광지로 보도했다. 집들은 빨강 파랑 노랑 형형색색의 지붕이며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과 미로처럼 굽은 골목을 보면 마치 그리스의 산토리니섬 집들을 연상케 한다.

2010년에 감천문화마을 ‘관음정사’에 주석한 보우 스님은 군위군 의흥에서 유년을 보내고 범어사 옥천암으로 출가했다.

스님의 속명은 이상화다, 그는 참선과 사찰에만 머물지 않았다.
1992년 시인으로 등단, 시집 『그 산의 나라』외 4권, 한시집 2권, 장편소설 『영혼의 바람』 등을 많은 작품집을 출간했다.

고향향우회에 지원에도 적극적이며 지난해 4월 ‘고향사랑기부금’에도 동참, 필자가 대신하여 군수님에게 기부금을 전달했다. 자비에 남다른 보우 스님을 2021년 ‘재부의흥면향우회 자랑스러운 인물’로 선정, 감사패를 증정했다.

관음정사에 머문 시간이 지체되어 두 번째 방문할 ‘청량사’를 가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감천항을 바라보면서 서서히 내려와 낙동강대로 따라 신평 지나 하단 부근에 이르렀을 땐 오후 1시 가까웠다. 기이 늦었으니 야외에서 점심을 때우고 3시쯤에 청량사에 도착하기로 조정했다.

허기를 느낀 일행은 다대포 해변 그늘진 소나무숲에 자리를 잡고 준비해 간 음식에 술잔을 주고받으며 상쾌한 바닷바람이 섞인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얼마간의 휴식을 취한 뒤 앉았던 자리를 말끔히 정리하고 대기 중인 차에 올라 청량사를 향해 출발했다.

오후 3시경 청량사에 도착했다. 청량사가 있는 강서구 명지동 일대는 지금 에코델타시티 조성사업으로 건설현장은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다.

청량사는 산자락의 사찰과 달리 평지에 서 있어 분위기가 색다르며 경내는 키 큰 나무들로 둘러싸여 풍광이 푸근하고 넉넉해 보였다.

‘청량사’도 에코델타시티 건설권역에 포함돼 일주문이 폐쇄되어 절 옆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청량사에 들어서자 현엽 스님은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이했다.
종무소 마루 앞에서 출가 후 거의 50여 년 만의 만남에도 어색함이 없이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어서 청량사의 창건 유래와 구전으로 내려온 설화 등을 소개하며 본당 ‘극락보전’ 편액을 써 주신 스승과의 인연, 주련의 의미도 각각 풀이해 줬다.

20여 년 전에 청량사에 주석한 주지 스님의 법호는 운암이고 법명은 현엽이다. 군위 의흥면 지호리 출신으로 속명은 김상문, 의흥 동부초등학교를 나와 한학을 3년간 수학했다.

유년에 고향을 떠나 출가하게 된 사연을 말하는 순간에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상기된 표정이었다.

현엽 스님은 1971년에 출가한 이후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송광사, 해인사, 불국사 수도암, 법주사 복천암, 망월사 등에서 9년간 안거했다.

현엽 스님은 부산 불교사회교육원 이사장을 역임하고, 조계종 호계위원도 지냈다. 현재 ‘부산 강서사암연합회’ 회장, (재)강서구 장학회 운영이사, (재) 청미단 운암장학회 이사장, ‘함께하는 행복, 나누는 기쁨, 청미단’ 대표, 낙동강 상생포럼 지도법사, 강서경찰서 경승을 맡고 있다.

저서로 ‘선리禪理로 읽는 채근採根 130목目’과 ‘솔바람은 그림자를 남기지 않나니’ 등을 발간했고, ‘강서구보’ 등에 칼럼을 쓰고 있다.

현 청량사 주지로 1991년에 창간한 ‘월간 공부방’ 발행인이기도 하다. 고향이 같은 운남 현엽 스님을 2021년 ‘재부의흥향우회 창립30주년’을 기념하는 창간호에 ‘자랑스러운 의흥 사람들’에 선정, 등재했다.

청량사 방문일정을 마치고 현엽 스님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데 우리 모두에게 명지동 특산품 ‘김’을 한 묶음 선물로 줘 받았다.

돌아오는 길이 서운하면서도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부산에서 적멸보궁 ‘관음정사’ 주지로, 범어사 말사 ‘청량사’에 주석하는 주지 스님을 둔 자랑, 기쁨, 나만 느끼는 뿌듯한 행복감인가. 고향 사람들과 함께 사는 세상 무어라 말을 다 하랴. 오늘 하루 두 산사 순례길 일정을 마무리하고 오후 5시 조금 지나 굿바이∼∼ 헤어졌다.

황성창 시인 수필가
(재부의흥면향우회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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