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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쉬엄쉬엄 갈 것이지 뭐가 그리 급하던가

admin 기자 입력 2024.06.17 21:57 수정 2024.06.17 09:57

-故 一史 박헌열 박사를 추모하면서

↑↑ 황성창 수필가
ⓒ N군위신문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기 마련이다. 죽음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데도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조차 꺼린다. 하지만 잘사는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남녀노소 누구나가 속절없이 죽음을 향해 무던히 가고 있다. 만만찮은 이생의 삶이지만, 지금 순간 살아있는 ‘운 좋은 삶’도 언젠가 죽음으로 소멸할 운명이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듯이, 죽음이 있어야 삶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삶을 마무리해가는 죽음의 골목길이다. 살아서 더 돌아봐야 할 곳이 없고, 더 올라가도 볼 곳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맞이하는 죽음은 얼마나 자유로운 희열일까?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강이 깊은 바다를 기억하고 숲이 큰 나무를 기억하듯 존재했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 그게 바로 영원불멸이 아니겠나.

지난 5월 마지막 가던 날 죽마고우 一史 박헌열 박사의 부음을 전해 들었다. 부음 소식에 나는 슬프다는 느낌보다 허황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이 풍진세상의 굴레를 흔연히 벗어던지고 훨훨 날아가듯 귀천(歸天)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아서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던가.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기억 속의 세월, 6·25 전후인 1953년 의흥중학교 입학식 날 의흥향교 마당에서 처음 만났지 않았던가.

새카만 까까머리들이 어느 세월에 귀밑머리에 하얗게 무서리가 내려앉았다. 곡절 많던 70여 성상을 함께 가가대소(呵呵大笑)하며 있는 정 없는 정 다 나누며 추억을 쌓았다. 추억은 소중하다.

기러기가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듯, 우리의 우정을 쌓은 정든 탑을 순식간에 허물고 지운 사악한 요괴가 죽음을 불러들였다.
한순간에 세연(世緣)을 끊고 훌쩍 떠난 고인에 대한 기억을 새삼 더듬어보니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별 하나가 서산 노을 속으로 사라졌다. 한 시대를 밝힌 그 광휘(光輝)가 사라진 대신 전설만 가득 남았다.

경영학 박사로, 세무회계사로, 대학 강사로, 공인중계사로, 설법하는 법사(法師)로, 저 찬란한 경력들을 어떠하면 좋으랴. 화려한 직함으로 한 시대를 고고(孤高)히 누볐던 고인이 끝내 눈을 감고 세상을 하직했다.

속담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본다’는 말이 있듯이 중학생일 때부터 고등학교, 대학까지 줄곧 학생회 회장직을 맡아 남다른 지도력을 발휘했다.
1960년 4·19 민주화 운동에도 혁명적 깃발을 휘날리며 시대의 변화를 이끈 용기 있던 친구였다.

이런저런 고인을 추모케 하는 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늘 시대를 앞서가든 고인의 자리를 붙박이 말뚝처럼, 죽음이란 괴물이 만상(萬象)을 포박(捕縛)하고 말았다.

생전에 故 박헌열 박사는 모교 후배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 미담도 예의를 갖춰 차제에 밝힌다.

1955년 3월 의흥중학교 제4회로 졸업한 고인은 학구에 진력하는 후배들을 지원하기 위해 동기동창들의 십시일반 후원금과 상당 금액의 사비(私費)를 헌납해 장학기금을 조성했다.

이 기금으로 1973년 2월에 ‘의흥중학교 동창장학회’란 이름으로 장학회를 발족, 대표직도 맡았다. 이후 50여 년 동안 선발된 장학생 381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배움의 열의에 후원하고자 많은 힘을 보탠 선량한 독지가(篤志家)이기도 했다.

고인의 발자취를 보아 의흥중학교 졸업생 중 가장 보람 있는 일을 성취한 고인에게 마지막 뜨거운 갈채를 아낌없이 보내고 싶다.

어떤 권력자도, 위대한 인물도 자선 독지가도 죽음 앞에선 아무것도 피할 순 없었던 모양이다.
우리 속담에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의 산업화·민주화 시대에 거대한 물줄기를 헤치며 명예롭고 의로운 이름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친구가 왜 이리도 자랑스러울까. “저 건너 죽음의 섬에는 내 청춘의 무덤이 있다”라는 니체의 말과 함께 고인이 잠든 4·19 민주묘역에서 태곳적 고요가 아프게 부딪혀온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더니, 인생이 이토록 허망한 것인가. 죽음이 비참하고 허망한 것은 실타래처럼 엉킨 망자와의 모든 인연이 단절되고 상실하기 때문이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이별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남과 헤어짐 사이에 그리움이 너무 가득해 박남수 시인의 ‘옛 벗을 그리며’란 시의 한 연을 읽어보겠다. (중략) ‘나는 이승에 있고/당신은 저승에 있어도 좋습니다/우리는 헤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후략)’ 그리움은 만남과 헤어짐 사이가 멀면 멀수록 짙어진다는 걸 실감한다. 그러므로 이승과 저승 사이의 그리움만큼 진한 것이 없는 것 같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열흘 지나 달이 차는데도 고인에 대한 그리움이 메어친다. 인간이 가는 ‘죽음의 계곡’에는 홀로 쓸쓸하게 가는 것은 다 아는 일이다. 인간 한세상 100년도, 수유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선지 삶의 끝자락 죽음과는 아름다운 작별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 같다. 지금, 이 시각 우리가 그리워하는 이름에 대한 그리움을 멈출 수가 없다.

그래서 고이 보내야 할 고인과의 이별은 서럽고 힘든 가슴앓이인 것이다.
이승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故 박헌열 박사의 이름 석 자를 나직이 불러 본다.
삼가 명복을 비나니 천상천하를 유유(悠悠)하며 내내 안식을 누리소서. 친구여! 하늘에서 복을 길이길이 누리시기를---. 하늘이시여! 부디 고인을 영면(永眠)에 들게 하소서.

황성창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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