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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광복절에 대한 소고(小考)

admin 기자 입력 2024.09.04 22:03 수정 2024.09.04 10:03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엊그제 처서가 지났건만, 중천에 솟은 해는 여전히 화염을 강하게 뿜는다.
온열 질환자가 속출하고 그로 인한 사망자도 20명이 넘었다고 한다. 가축과 양식장 어류도 무더기로 폐사하고 있다 하니 축산농가나 어민들의 피해가 커 걱정이다.

원인은 지구온난화 탓이라는데, 아무리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대개 광복절을 기점으로 한풀 꺾이는데 올해는 분명 이상기온인 것 같다. 8월이 다가서도 불같은 성질을 부리고 있으니 슬슬 달래면서 끝 여름을 잘 버텨봐야겠다.

올여름엔 모두가 찜통더위와 열대야에 밤낮으로 시달려 기진맥진한다. 이런 열기에 스트레스마저 잔뜩 쌓여있는데 광복절 행사를 앞두고 불거진 건국일 논쟁으로 시끌벅적하다.

광복이란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라는 뜻이 아닌가. 그런 날에는 응당 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기고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는 등 국민 통합의 자리가 돼서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국민 분열상만 적나라하게 보여줬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대한제국이 왜 망했는지 원인도 채 모르고 광복회 행사를 한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던가.

광복절 날 광복회 당사자와 정치인,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서로가 옳다고 삿대질에 핏대까지 올리는 아수라장을 보려니 짜증이 절절 끓었다.

우리 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저마다 주판알 튕기는 흑심은 있을 것 같은데 까발리지는 못하고 슬쩍슬쩍 눈치만 보고 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될 때까지 일본 침략에 항거하던 항일운동 40년사를 각기 내 논에 물 대듯이 ‘아전인수’격으로 끌어대는 말솜씨는 가히 청산유수다.

중구난방으로 주장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자칫 피눈물로 얼룩진 비분의 독립운동사를 왜곡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1910년 8월 22일 27대 순종 왕이 일본 명치 천황에게 조선의 통치권을 넘겼다. 한일합병조약 제1조에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하고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讓與)한다”라고 적혀 있듯이 한국은 마침내 모든 국가 권력을 넘기고 말았다.

한편으론 일제가 친일 세력인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진회를 앞세워 ‘조선인이 원한다’는 논리로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안타깝게도 조선은 27왕조 519년의 파란만장한 조선의 흑역사는 막을 내리게 됐다.

조선왕조가 왜 무너지고 국권은 어떻게 해서 빼앗겼는지, 이참에 한 번 성찰해 보자.
조선이 개국한 이래 몇 임금을 제외하곤 늘 붕당 정치와 세력 다툼으로 태조 이성계가 내건 성리학에 따른 건국이념은 어느새 사라졌다. 개국 일등공신 정도전이 창안한 정치철학은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한다. 따라서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요, 군주의 하늘이다”라는 혁명론을 내세워 조선을 건국했다.

이렇듯 건국 초기에는 국민을 ‘하늘로 섬기겠다’라는 정치철학과 국가의 비전이 만백성이 군주를 믿고 따를 만큼 혁신적이고 신선했다.

그렇게 개국한 조선왕조가 얼마 가지 못해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반목과 모함이 반복되기 일수였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조정은 피바다가 됐고, 수양은 조카 단종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는 등 참화(慘禍)사건이 부지기수로 일어나지 않았던가. 더욱이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를 비롯하여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조선을 망국으로 치닫게 한 대표적인 4대 사화다.

조정에서 위세깨나 부리던 고관대작 중 관직을 박탈당하지 않고 유배 가보지 않은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이쯤 되면 누가 봐도 나라 망하는 건 뻔한 이치라 하지 않겠나.

반면에 일본은 1854년경 이미 서구 문명에 눈을 떴다. 세계의 열강들과 화친을 맺고 문호를 개방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일본은 위로는 천황으로, 아래는 개개 국민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개혁을 통해 근대화를 성공시켰다.

이를 통해 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근대화 시기 일본과 조선의 격차는 지식인층의 지적 역량의 격차만큼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 등 열강들은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식민지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정글 속 동물의 왕국처럼 힘센 나라가 약한 나라를 잡아먹고 먹히는 그야말로 약육강식하던 격동기, 대혼란의 시대였다.

개혁을 통해 국력을 키운 일본은 온갖 위협으로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다. 마침내 1876년에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부산포도 원산항도 개항되었다.

이런 격변기에 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오로지 권력 쟁탈전으로 왕정王廷은 뒷전이고 허구한 날, 죽기 살기식 세력 다툼에 국론은 사분오열하고 국격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속담이 딱 맞는다. 녹봉(祿俸)을 타 먹던 권신들도 카멜레온처럼 변신해 을사오적이 되었다.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등은 매국노답게 떼돈을 챙겨 떼부자 된 권간(權奸)이 어디 한둘뿐이겠나. 군신들이 다 이 지경들이니 종묘사직을 누가 힘들게 지키려 했겠나.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합병하자 백성들이 항일운동에 나섰다.

국내에서, 해외에서 펼쳐진 민족적인 독립운동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독립은 쟁취하지 못했다.
2차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해방이란 선물로 승전국들이 대한에 광복을 안겨줬다. 부끄럽게도 자력으로 광복을 찾은 게 아니라 미국 등의 승리로 얻은 광복이다. 어느 나라든 망국의 원인에는 여러 변란이 있게 마련이다.

조선의 멸망, 숱한 오욕의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불과 백 년 전 일이다.
그런데 근래 광복절을 전후해서 건국일 논쟁에 불붙인 광복회장이나 편향된 정치인들 주장에 실망을 느꼈다.

광복에 헌신한 독립유공자의 유족들 시각에 따라 혹 불평불만은 있을 수 있으나 지금처럼 일방통행식 분열과 대립을 의도적으로 지속한다면, 구한말 망국의 길로 치솟던 모함과 갈등, 대립과 반목이 조선 시대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독불장군처럼 외고집만 부리다면 나라의 미래는 뻔하지 않겠나.

광복은 연합국의 승전으로 얻어진 결과물이며 당시 정치 지도자들도 떨떠름한 심정으로 광복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본이 패전한 지 79년이다.
강산이 여덟 번 바뀌고, 해방둥이가 백발노인이 다 된 세월이다.
과거 조선이 망했던 원인을 반면교사로 국력을 배양하고 국제 사회와 밀접한 교류를 통해 협력을 다져야 한다.

거미줄처럼 얽힌 논쟁도 역지사지로 풀어보자. 타협의 결과에 승복하는 자세도 가져보자.
언제까지 그때 그대로 변하지 않고 살 건가. 시대에 맞게 이 사회를 견인해 나갈 수 있는 집단 지성이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 있기 바란다. 성경에 “너희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명언을 가슴에 품고 광복절에 희망을 걸어보자.


황성창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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