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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탐스럽게 영근 가을

admin 기자 입력 2024.10.03 23:37 수정 2024.10.03 11:37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가을이 소슬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오락가락하는 장맛비를 가지고 전국을 누비며 활개 치던 여름이 숱한 추억을 남기고 하늬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다.

그 자리에 가을이 익어감을 알리는 듯 슬며시 찾아든다. 여름이 끝나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죽었다 살아난 기분이다.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여름 찌든 일에 깔딱 숨으로 겨우 버텼다. 허파에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니 살맛이 난다.

수확을 며칠 앞두고 약간의 쉬는 시간이 있다. 지난해 황홀했던 가을의 향연을 더듬어본다.
들녘은 황금을 가득 실은 비단 물결이 실바람 타고 살랑인다.

울긋불긋한 오색 단풍은 남쪽으로 내려갈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 언제쯤 올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지루한 여름에 고생했던 것들이 부푼 가을맞이 준비에 한 순간에 잊어버린다.

여름을 아쉽게 떠나보내고 기쁜 마음으로 가을을 맞이한다. 이 순간은 참으로 행복하다.
깊어져 가는 가을밤 귀뚜라미가 밤새도록 울어댄다. 무엇이 그리도 억울하고 슬픈지 처량한 목소리로 슬픔을 토해낸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내 마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왜인지 알 수 없으면서도 공연히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다. 눈물도 썩었지!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질 줄 이야, 짝 잃은 귀뚜라미가 짝을 찾아다니느라 밤새껏 울고 있었던 걸 누가 알았던가.

웃고 울며 야단법석 떨던 긴 여름이 공연을 마치고 가을을 찾아가 무더위를 참고 이겨내느라 고생 많았다며 작별 인사를 한다.

품성이 본래 더워 어쩔 수 없다며 어정쩡한 말을 잇는다. 영글어 가는 오곡들을 돌아보면서 장마 때문에 고생 많았지? 미안한 듯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혹시나 늦더위에 태풍이 찾아와 너희들에게 또 애 먹일까 봐 불안하다면서 조심하거라 한마디 말 남기고 사라진다.

봄에 하는 일은 할수록 많아지고 가을에 하는 일은 할수록 줄어든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바쁘지만, 마음은 늘 넉넉하다.

가을의 일상은 변화가 없다. 일 철이 시작되면 일손 부족으로 눈코 뜰 새 없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정신이 없다. 부지깽이도 일어나 거들어 줄 만큼 무한정 바쁘다.

걸음마 배우는 아기가 마당에서 삐뚤 걸음으로 걸으며 손에 닥치는 대로 입으로 들어간다. 입가엔 닭똥으로 뒤범벅이 되어도 닦아 줄 새 없다. 온 식구가 추수하는데 매달려 하느라 잠시도 눈 돌릴 수 없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 하기보다 숨 쉴 수 없을 만큼 바쁜 계절이라 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끝없이 펼쳐진 넓은 들판은 머리에 수건을 매고 흰옷 입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하얀 두루미가 가득 앉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볏단을 한곳으로 모으느라 땀이 비 오듯 하다. 붉은 노을이 짙게 깔리면 들녘은 하루해를 마감하고 고요 속으로 빠져든다.

벼 이삭이 익어가는 것을 보면서 노력의 대가를 받은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하다. 소 길마에 걸채를 묶고 백여 개 볏단을 실어 나른다.

아침을 일찍 먹어서 그런지 불룩한 배가 홀쭉했다. 일이 보배라고 하신 어른들의 말씀이 떠오른다. 점심때가 되었다. 갈치에 무, 파 넣고 부글부글 끓인 찌개와 풋배추 한 잎에 생된장을 조금 넣어 싸 먹는 밥맛은 꿀맛 같다.

어린 나이에 볏단을 가득 실은 황소를 몰고 집까지 온다는 게 쉬운 일 아니다. 좁은 길목을 지날 때면 혹시 걸채가 담벼락에 걸려서 소가 볏단과 같이 넘어질까 봐 가슴 조마조마했던 거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오전에는 힘이 남아돌아 간다. 오후가 되니 힘이 빠져 지치고 괜스레 짜증이 난다. 하던 일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볏단을 집으로 모두 실어 날랐다. 온 식구가 매달려 탈곡기로 몇 날 며칠 타작한다. 타작할 때 한쪽 발로 탈곡기를 밟고 볏단 끝을 탈곡기 날에 서서히 갖다 대면서 양손으로 볏단을 굴리면서 한다.

쉬워 보는 것 같아도 매우 위험하다. 볏단을 꼭 잡고 탈곡기 돌아가는데 딸려 들어가면 절대로 안 된다. 잘못하면 손가락 끊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타작이 끝나면 무 배추 등을 뽑는다. 때로 아버지는 촘촘하게 자란 무 배추를 솎아 소로 실어 나른다.

이날 우리 집은 시장 날이다. 이웃 아주머니들이 몰려와서 무 배추를 다듬어 주고 가지고 갈 만큼 다듬어 가지고 간다. 이웃사촌이다.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으며 허물없이 지내던 살기 좋은 세상이었다.

소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아버지는 소에 정성을 다하신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하신 것을 보고 자란 나는 소에 대한 애착심이 남달리 많았다.

농촌의 가을은 일 년 중 제일 바쁘다. 추수가 끝나면 아버지는 넓은 마당에서 짚으로 이엉을 엮는다. 아버지 성품은 침착하고 조용한 편이며 인정은 남달리 많으시다.

그러면서도 어려움이 닥쳐도 좀처럼 남에게 부탁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혼자 해결하고 처리하는 편이다.

이웃 사람들이 놀려와서 이엉을 엮는 것을 보고 “혼자 어떻게 다 엮으려고 합니까?” 보다 못해 이웃 사람들이 도와준다.

어깨에 둘러메고 사다리 타고 지붕까지 올라갈 정도로 큼직한 이엉을 엮는다. 이엉을 하나씩 엮을 때마다 술 한잔 나누며 밤이 깊어지는 줄 모르고 엮고 했다. 며칠 뒤 그분들이 지붕을 잇는데 도와준다. 살아오면서 이웃과 거리감 없이 사촌처럼 잘 지내온 덕이라며 아버지가 해맑은 얼굴로 말씀하신다.

겨우내 먹어야 할 김장 단지를 응달진 담벼락 밑에 묻는다. 그 옆에 깊은 구덩이를 파 놓고 무 배추 뿌리 등을 넣고 구덩이 앞에 짚으로 막아놓는다. 분주했던 가을이 모두 끝난다.

여름 내내 활처럼 굽었던 허리를 똑바로 펴면서 등을 퉁퉁 두들겨 본다. 살았구나! 내년에 따뜻한 봄이 찾아올 때까지 두 다리 쭉 뻗고 편안히 쉬어보자. 사람 팔자 알 수 없다. 이보다 더 편할 수 없다. 탐스럽게 영근 가을은 정녕코 풍성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계절임이 틀림없는가 보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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