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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내고향 의흥에서 만난 송덕비

admin 기자 입력 2025.04.04 10:28 수정 2025.04.04 10:28

↑↑ 황성창 작가
ⓒ N군위신문
고향을 떠난 지 근 70년이 되었다. 덕지덕지 나이가 쌓일수록 고향에 대한 옛 추억들이 여기저기서 새록새록 돋아난다. 아름다운 추억이든 부끄러운 추억이든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모두가 내겐 좋은 추억들이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아버지의 고향, 군위군 의흥면 읍내리 바깥 장터에 마련된 마당이 넓적한 초가집이 내 고향으로 인연 맺어진 시골집 생활의 시작이었다.

우리 집 남향 쪽마루에 앉아 보면 지척에 동서로 길게 뻗은 남천방이 보인다. 그 남천방 넘어 장미산(일명 거북산) 꼭대기가 겨우 보일 정도로 어릴 적에는 제방이 제법 웅장하게 느껴졌다.

1950년 6·25 전쟁 전까지는 그 남천방엘 하루에 수도 없이 오르락내리락 했을 성싶다. 딱히 갈 곳도 없어 그랬겠지만, 한국의 시골이란 환경 변화에 신기해서 그랬을 것 같다.

내가 태어나 자라고 익힌 6여 년 동안의 일본 오사카(大阪)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낯선 시골 풍경에 나름대로 익숙해 보려고 들락거렸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철이 채 들기도 전에 남천방을 쌓은 분의 함자를 어머니로부터 얼핏 들었을 뿐 그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몰랐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새겨두지 않았다.

그런 말들을 잊고 산 세월이 수십 년은 된듯하다. 그 후 공·사적인 일로 고향을 드나들 때마다 지금의 확 트인 동부로(옛 남천방길) 위를 달리면서 언뜻 본 어릴 적 고향의 초가집 모습은 사라지고 매일 같이 다니던 골목길도 찾아 헤맬 정도로 어룽거리니 고향도 참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만 늘 가졌다.

어머니가 처음 지으신 집에 지금은 누가 살까 궁금해서 찾아가는 정도에서 끝이다.
나는 부산에서 군위로 가는 지름길이 있어도 버릇처럼 의흥의 남천방 길 위를 달리면 왠지 마음이 야릇해져 언제나 그 길을 택했다.

의흥중학교 3년을 공부했던 의흥향교 광풍루 건물을 힐끗 쳐다보는 감회도 남다르다.
동부로가 확장 개통된 이후에도 수십 번을 오갔을 남천방 길에서 처음 본 듯한 비석을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 황성창 작가와 출향인사 박정목 재부의흥면향우회 회장, 최형수 재부팔공산악회 회장이 고경수 선생의 송덕비 앞에서 업적을 재조명 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다짐했다.
ⓒ N군위신문

‘송덕비(頌德碑)’였다. 한 자 한 자 짚어보니 어릴 적 말만 들었던 남천방을 쌓았다는 위인전에나 나올법한 ‘붕전(鵬田) 고경수(高慶壽)’ 선생의 송덕비를 처음 본 것이다. 언제부터 여기에 세워져 있었는지 이제야 보게 되다니 내 무심결의 소치로 빚어진 일 아니겠나 싶다.

차를 세워놓고 보는 길손이든, 남천방길을 걷는 주민이든 관심 가진 사람만이 찬찬히 글자를 흟어봐야만 비석의 사연을 알 수 있으니 누가 위험한 도로변에서 유심히 보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송덕비 앞을 스치듯 지나면서 편하게 보고 비석의 깊은 뜻을 후세에 쉽게 알릴 방법은 없을까? 오로지 의흥면민의 안락한 삶과 홍수로 수해를 입을 농경지나 가옥 등 면민들의 재산 보호를 위하여 거액의 사비로 남천방을 쌓은 은덕에 대한 예우 차원의 고민이다.

약 700∼800 미터의 긴 남천방 축조에 소요되었을 자재비, 품삯을 따진다면, 지금으론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큰돈이 들었을 성싶다. 그 거금을 혼자 부담하였다니 대단한 위인임엔 틀림없는 사실이다.

더욱이 고경수 선생 나이 21세 때 벌인 대역사라 인지라 믿기지 않을 정도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역사를 그 나이에 장삼이사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 같다.
조선 왕조 27대 518년 역사에서 어느 임금도 하지 않았던 수방(水防) 공사를 1년 만에 거뜬히 마무리했다니 얼마나 대단한가.

의흥면민의 오랜 세월의 숙원 사업을 이루어냄과 동시에 구휼(救恤)에도 남달랐다고 생각한다.

고경수 선생의 의흥면을 위한 일편단심은 누가 뭐래도 두고두고 기리고도 남을 만한 태산보다 더 높은 업적이 아니겠나.

21세의 약관에 고경수 선생이 남천방을 쌓을 1936년은 엄혹한 일제강점기 때다. 1910년에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으로 이삼십대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안중근 의사는 28살에 항일 비밀 결사체를 조직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윤봉길 의사도 22세 때 일본군의 상해 전승기념행사에 폭탄을 투하하고, 이봉창 의사 역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열 투쟁을 전개하여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린 젊은 독립운동가들이다.

이렇듯 젊은 독립운동가들 못잖게 고경수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고향 사람들에게 국가를 대신하여 제방 공사로 일터를 주고 품삯을 줘서 생계비에 적잖은 보탬을 줬으니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일거양득을 거둔 셈이다.

이런 훌륭한 사람을 독립운동가 못지않은 무상 보시를 몸소 실천한 구국의 독지가라 높이 칭송하고 싶다.

미국의 랠프 월도 에머슨의 시 ‘무엇이 성공인가’의 일부를 옮겨보자.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만들고/ 건강한 아이, 조그만 정원/ 또 개선된 사회 환경에 의해//그리고 당신의 삶으로 인해 어느 한 사람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성공이네’라고 시인은 말했다. 인생에 있어 성공의 의미에 관한 에머슨의 메시지가 ‘고경수 선생’의 순수한 베품이 처음부터 의도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선생의 삶이 성공한 것 같아 마음에 깊이 닿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어머니’이고 가장 아름다운 말은 ‘감사합니다’라고 한다.
‘행복은 언제나 감사하는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라는 말이 있다. 감사할 줄 모른다고 욕할 수는 없지만, 감사를 모르는 사람답지 않은 삶을 결코 복 받은 삶이라 하진 않을 것이다. 감사는 인간에게 최고의 백신이자 인생의 참된 면역체계가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로 의흥이 고향인 필자의 발의로 재부의흥면향우회에서 고경수 선생의 송덕비 주변 환경을 빛나게 꾸려보기 위해 가칭 ‘고경수 길’ 만들기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그분의 업적을 재조명해 볼 생각이다. 설치 규모는 간소하겠지만, 나름의 의미를 담아 현 공덕비 주변에 현대식 안내 현판을 세워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한 번 더 알릴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

우리 고장에서 제2의 고경수, 제3의 고경수가 나올 수 있는 기대를 걸고 후손들도 선생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추진하게 되었다. 하고 싶은 추진계획의 실천 여부는 군위군이나 의흥면의 행정적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이룰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속담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을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의지가 있으면 결국 이룰 수 있게 된다는 것 아닌가. 그런 신념으로 ‘고경수 길’ 명명(命名)을 청원 추진하려 한다.

관계 기관의 적극적인 협력과 지원이 필요하다. 더불어 의흥 주민들도 재부의흥면향우회가 추진하는 사업 의도에 적극 협력 동참하는 지혜를 모아줬으면 한다.

그렇게 도와준다면, 추진하려는 사업은 순조로이 진행되리라 믿는다. 올해가 고경수 선생 탄생 110주년이 되는 해다. 의흥을 고향이라 부르는 후손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기릴 수 있는 전기가 되었으면 한다.


황성창 시인/ 수필가
재부군위군향우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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