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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
| ⓒ N군위신문 |
며칠 전 고목 한 그루가 비참하게 쓰러졌다. 슬픔도 가시기 전에 어젯밤 애지중지 아끼던 고목 한 그루 또 소리 없이 쓰러졌다.
마치 누가 먼저 쓰러지나 내기라도 하듯 마음이 아팠다.
일찍이 우리들은 굽이굽이 쳐 돌아가는 깊은 산속에서 살아온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불행히도 비참하고 참혹했던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살아온 우리는 부귀영화도 누려보지 못하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난 친구가 숱하게 많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나던 날은 37℃로 역대급 폭염으로 올해에 제일 더웠다. 그도 그렇지 아무리 더워도 떠나가는 마지막 길에 정든 고향에서 몇 밤 더 자고 가면 좋으련만,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하얀 가루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니 할 말이 없다.
이제 남은 친구라고는 얼굴은 뼈만 앙상하고 허리는 활처럼 굽어 바람에 곧 쓰러질 것만 같은 친구뿐이다. 멋있고 씩씩하던 그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친구가 마지막 길 떠나도 들여다볼 친구 하나도 없다. 그나마 오늘 찾아온 친구 둘이 있다는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니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은 그칠 줄 모르고 쉴 사이 없이 줄줄 흘러내린다.
대구에서 오는 친구를 마지막 보려고 더위도 잊은 채 기다리고 있다. 친구가 올 때까지 생전에 친구가 남긴 흔적을 둘러보고 싶어 집으로 들어가 보았다.
마당에 들어서니 지난 추억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큰 방에는 뭐 하려고 했는지 작업하다 남겨둔 흙이 아직도 촉촉한 채로 있다.
작업장 옆에 연탄난로가 있고 신고 다니던 신발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죽음을 예측했든지 먹이던 소를 언제 팔았던지 마구간은 텅 비어 있다.
비좁은 소 마구간에 소를 여섯 마리 키우면서 다른 집보다 훨씬 더 많이 힘들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인공 수정할 때 좁은 마구간에 들어가 코뚜레 잡아주고 낑낑거리던 모습이 아련하다.
그런데 농사지을 때 필요한 농기구가 있으면 훨씬 더 편리하고 수월할 텐데 그렇지 못해 때론 보기가 참 안타까웠다.
하기야 경제가 넉넉하지 못해 쉽게 할 형편이 못 되겠지만, 이왕 할 것 같으면 일찍 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실컷 고생한 뒤에 하는 것을 보면 정말 딱할 때가 있었다. 뒷북 친다는 말을 노래 같이해도 들은 둥 만 둥 한다.
농촌에는 웬만한 가정이면 고추 건조기, 관리기, 트랙터 등 농기구는 거의 다 가지고 있다.
친구 집도 중산층 넘는 집으로 살 형편이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고집스럽게 사지 않은 것을 보면 정말 답답했다.
어느 오일장에 나와서 고추 건조기를 샀다고 은근히 자랑한다. “좁은 마당에 놓을 장소 있더나?”하고 빗대어 물었다. 놓을 곳이 마땅찮아 애를 먹었다 하면서 머쓱해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되어 가정용 정미 기계 하나 드려 놓았다고 서먹서먹해하며 말한다. 내가 말할 때는 들은 둥 만 둥 죽으라고 안 산다고 하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나! 진작 살 걸 늦었지만 잘했다고 말해 주었다.
비좁은 마당에 있을 것 다 있고 없을 것 다 없었다.
그래서 친구 집을 ‘부엉이 집’이라 이름 지어 주었다. 살아온 흔적들을 알뜰히 살펴보고 내려와도 대구에서 출발한 장례차가 도착하지 않았다.
걱정되어 전화해 보았다. 다 왔다는 소식 듣고 안도하며 기다린다.
잠시 후 검은 세단 한 대가 소리 없이 멈춰 선다. 뒤따라 상주로 보이는 사람들을 태운 중형 버스 한 대가 뒤따라 선다.
어째까지만 해도 멀쩡한 사람을 화장해서 잿봉다리로 만들어 상주가 들고 세단에서 내린다. 세상에 이를 수가! 숨이 막히는 듯 아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상주가 영정사진 들고 앞선다. 뒤따라 상주들이 집으로 들어간다. 집 한 바퀴 돌고 밖으로 나온다. 영정사진을 붙들고 잠시 눈 맞춤 한다. 잘 가거라. 사는 동안 고생 많았다. 거기에 가서 일찍 간 친구들 만나 안부 전하고 편안히 잘 지내거라 하며 두 손 모아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사람 사는 것 아무것도 아니다. 죽으면 흙 한 줌밖에 안 되는 인생 지지고 볶고 살아온 것이 한낱 꿈과 같았다.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되겠지, 슬픔이 가득 찬 이야기 하며 돌아왔다.
그날 저녁에 잠을 설치며 이 생각 저 생각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친구와 나는 초등 동기 동창생이다. 초등 졸업 후 처음 만난 것이 친구 맏이가 장가갈 적에 주례해 주었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 후 초등 동기회를 비롯하여 계 모임 등 활발한 모임이 시작되었다. 그러다 친구 동네에 있는 자두밭을 샀던 것이 좋은 만남의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어릴 적 아버지가 농사지을 때와 지금 농사짓는 것이 많이 달랐다. 농사가 현대화되면서 농기구가 없는 거 없었다.
풀 베는 예초기, 땅 고르는 관리기, 퇴비 등을 실어 나르는 트랙터가 쏟아져 나왔다. 돈이 귀했을 때였다.
친구와 어불러 예초기 한 대 샀다. 예초기를 사용하다 발가락 다리 등을 다치며 많은 사고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사용할 줄 몰라 친구한테 일일이 배워야 했다. 처음 손에 익지 않아서 생각보다 어려웠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전기톱도 사고 관리기도 샀다. 갖출 것 다 갖추었다. 농기구를 샀지만 사용할 줄 몰라 친구에게 일일이 물었다. 그럼에도 친구는 단 한 번도 싫어한 적이 없었다. 싫어하는 척이라도 했더라면 묻지 않았을 텐데 그런 눈치를 주지 않아 편하게 물어 볼 수 있어 좋았다. 큰 산을 두세 번 넘길 만큼 세월이 흘렀다. 둘은 정이 들 대로 들었다.
한 날은 트랙터 사고 싶다고 친구한테 말했다. 친구가 가지고 있다면서 사지 말라고 한다.
자기 집 마당이 좁아 트랙터를 놓아둘 곳이 마땅찮아 자네 자두밭에 있는 소 마구간에 두면 좋겠다. 그렇지, 여기에 두면 지붕이 있어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신경 쓰지 않아서 좋을 것 같다며 마구간에 두기로 했다.
그 후 차츰차츰 운전하는 것을 익히면서 트랙터 운전을 잘할 수 있었다. 농기구는 농기구 모두 사용하는 방법을 친구한테 배웠다. 사용할 때마다 고맙고 감사히 생각했다.
무더운 어느 여름 점심때가 되었다. 내가 손국수 좋아하는 거를 알고 있는 친구는 동네에서 손국수 했다며 어서 오라고 한다.
빈손으로 갈 수 없어 2리터 소주병 하나 사서 부리나케 운전해 갔다. 국수를 맛있게 두 그릇 먹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둘은 친구 자두밭 구경하러 갔다. 집 앞 자두밭을 둘러보고 산등성이 너머 있는 밭도 가 보았다. 앞이 훤하게 트였고 먼 산이 눈앞에 쏙 들어온다. 친구야! 네가 죽거던 여기에 묻어 달라고 해라. 묘터가 아주 좋아 보인다며 터를 잡아주고 내려왔다.
우리가 처음 계 모임 할 때 삼십여 명이었다. 반세기 훌쩍 넘는 동안 거반 다 죽고 열두 명만 살아 남았다.
숨만 쉰다고 산 것은 아니다.
모두 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천장만 쳐다보고 있다. 하나둘 떠나기 시작한다. 모임도 버티다 못해 촛불 꺼지듯 스스로 무너졌다.
천년만년 살고팠는데 허무한 게 인생이라더니 이런 것일까? 애석하고 슬프다.
지금껏 내 옆에 있는 친구라고는 셋뿐이다. 오늘 이 친구와 다른 곳에 있는 친구 둘이다. 이 친구는 성격이 온순하고 착하고 맡은 일에 실수 없이 잘해 왔기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호감을 보여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하는 오늘의 모습에 경의를 표한다.
사랑하는 친구야! 먼저 간 친구들 불러놓고 술 한 잔 나누면서 재밌게 지냈던 이야기를 꽃피우면서 잘 지내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지내기를 두 손 모아 빈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