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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이 난리통에도 꾸역꾸역 찾아 온 봄

admin 기자 입력 2026.03.18 16:35 수정 2026.03.18 04:35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삼월 초, 고요한 한밤중 섬광 같은 불빛이 캄캄한 중동 지역의 밤하늘을 가로지른다.

고층 건물이 화염에 휩싸이고 무너지는 소리에 깊은 잠에 빠진 사람들은 놀라 넋을 잃고 어리둥절하였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삼백사십 척의 유조선이 며칠째 발이 묶여있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 원유를 실은 ‘이글 벨로어(Eagle Veleour)’호가 전속력(약 11노트)으로 해협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소식에 온 국민이 환호하며 무사히 돌아오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 피란길에 나선 사람은 두려움과 공포감 증오에 찬 눈빛이 불같이 타오른다.

중동 지역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천지로 변했다. 이런 상황도 모르고 천연스럽게 찾아온 봄은 잔인하고 참혹한 광경을 보고 겁에 질려 꼬리를 내리고 다시 겨울로 되돌아간다.

때아닌 삼월, 40cm의 폭설로 집이 무너져 내려앉고 공항과 교통이 마비되고 정전 사태가 일어나 재산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삼월의 봄은 겉으로는 따뜻하고 포근하게 보이지만 속은 가시 있는 장미와 같다. 티끌보다 작은 잘못이 있어도 삐지고 새침 떼는 것을 밥 먹듯 한다.

꽃샘추위를 가지고 와서 봄을 설레며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짓밟아 버리는 것은 예사다.

강원도 인재에서 군 생활할 때다.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 된다. 기지개 켜고 겨울이 다 지나가는구나 하고 마음 놓았다.

그런데 이곳 삼월은 별난 데가 많아 삼월의 눈은 무서운 태풍과 같았다. 한 번 내리기 시작하면 끝일 줄 모르고 마구 쏟아붓는다. 낑낑거리며 눈을 다 쓸고 돌아서면 또 수북이 쌓였다.

수십 번 반복하고 나면 힘이 빠질 대로 빠진다. 추운 날씨에 이마에 구슬땀이 흐르고 등에서 김이 연기처럼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이젠 눈이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천진할 때 그 좋아했던 눈이 싫어지고 보기도 싫어졌다. 그럼에도 멍청한 눈은 누가 부르는 듯이 매년 이맘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럼에도 봄은 일말의 양심이 있어, 그냥 오기가 머쓱해 겨우내 땅속에서 가꾸어 온 온갖 꽃을 들고 온다. 꽃은 오래 머물지 않아서 아름답다.

꽃망울을 먼저 터뜨려 보려고 질투도 시기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복수초꽃이 피고 나면 목련이 피고 잇달아 할미꽃과 개나리 등 다른 꽃들이 필 차례를 기다린다.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제때가 오면 곱게 피고 지고 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스스로 행동하는 것이다. 사람이 세계를 지배한다지만 겸손해야 한다.

자연 속에 들어가면 아무런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봄이 오면 앙상하던 산과 들은 아름다운 꽃으로 둘러싸여 한 폭의 산수화 같다. 이때는 도시와 농촌 사람 할 것 없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꽃구경하러 가느라 정신이 없다.

농사일은 밑도 끝도 없다. 하면 할수록 많아지고 안 하면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적어진다.
농촌에 살다 보면 모든 것이 일장춘몽이다. 남들처럼 봄이면 꽃놀이 여름이면 시원한 바닷가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겠나만 마음은 뻔해도 쉽게 나설 수 없는 것이 농촌의 실정이다.

하루 일을 안 하면 굶어 죽나 하지만 말은 쉽게 할 수 있어도 실행에 옮기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남들이 쉬고 놀러 갈 적에 나는 밭 한 고랑이라도 더 매고 풍년 농사지어 자식들 배고프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마음 놓고 놀러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내 마음 한구석에는 자식 생각뿐이다.

농촌의 삶은 구수한 인정과 풍요로움이 넘친다. 자손 대대로 내려오면서 한곳에 모여 살아왔기 때문에 이웃이 사촌과 같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이면 마을 회관에 둘러앉아 지나간 이야기에 꽃을 피우며 시간을 보낸다. 이야기꽃이 시들어질 무렵 한 할머니가 창경원 벚꽃 구경했던 이야기를 꺼낸다.

자식들이 봄이면 창경원 벚꽃 구경하러 오시라는 성화에 한번 가 볼까 마음먹었다. 막상 가려고 하니 걱정이 앞선다. 촌사람이 서울에 가면 눈 빼 인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창경원 벚꽃 구경하고 돌아오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서울 사람들이 똑똑한 줄 알았는데 내 눈을 못 빼 가는 걸 보면 헛똑똑이야. 회관에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 가서 내 눈이 그대로 붙어 있지? 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한다. 사람들은 손으로 방바닥을 치며 박장대소하며 회관이 들썩들썩한다.

봄이 무럭무럭 익어 온 천지를 아름다운 꽃으로 뒤덮는다.
농촌에는 논밭 갈고 씨 뿌리고 일 년 먹을 양식 준비에 눈코 뜰 새 없다.
농한기가 접어들 무렵 한 친구가 진해 벚꽃 축제가 있다며 한번 가보자며 운을 띄운다.

농사일은 집집이 다르므로 일머리가 다 같지 않다. 농한기라도 시간 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며 나지 않는 친구도 있다. 날짜 맞추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더 어렵다. 주선하는 사람이 집집을 찾아다니면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우여곡절 끝에 날짜를 잡았지만, 간다, 안 간다. 시끌시끌했다.
한 친구는 돌아보면 온 천지가 꽃뿐인데 뭐 하러 그 먼 데까지 가냐 쓸데없는 소리 작작 하지 말라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어떤 한 친구는 같이 가자고 찰떡같이 약속 해놓고 출발 당일 집안에 일이 생겨 못 간다고 한다. 속이 상해 한 줌 갈기고 싶었다. 어떤 모임에도 이와 유사한 사람이 한 명씩은 꼭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르고 달래고 해서 겨우 같이 가기로 했다. 내일이면 보고 싶던 진해 벚꽃 축제에 간다. 설레는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출발 아침,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으로 한 친구가 나타난다. 시커먼 얼굴에 번쩍이는 테가 달린 선글라스 끼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꺼내 입고 제법 멋 부리며 팔자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온다. 처음으로 본 그의 모습은 정말 볼만했다. 농촌에 산다고 그렇지 어디에 내놓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일류 멋쟁이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진해를 향하여 적토마처럼 달린다. 점심나절 덜 되어 버스가 도착한다. 농사일에 골머리 하며 지내온 친구들은 진해란 낯선 곳의 풍경에 어리둥절하다. 지금까지 벚꽃을 많이 보아 왔지만, 깔끔하게 정리정돈이 잘된 진해 벚꽃은 보기도 향기도 빛깔도 아름답다.

여기 와서 보니 벚꽃뿐만 아니라 생각 이외로 볼거리가 많다. 꽃도 보고 사람 구경도 하고 붐비는 관광객들 틈 사이에 끼여 걸어가 보기도 했다. 사람과 부닥쳐가며 걸어보기는 생전 처음이다.

치장해 온 사람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바깥세상을 구경하지 못한 나에게는 ‘사람 사는 맛과 멋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아는 것만큼 보인다더니 눈 뜨고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만난 느낌이었다. 봄은 언제나 그랬지만, 이번 난리통에도 찾아온 봄은 우리에게 즐거움과 약동하는 새 희망을 안겨 주었다고 생각해 본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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