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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창 시인
수필가 재부군위군향우회 자문위원 |
| ⓒ N군위신문 |
역사 속 엄흥도는 어떤 인물인가. 세조의 서릿발 같은 어명을 거역하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다.
엄흥도는 사육신처럼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영월에서는 단종과 함께 추앙받는 인물이다. 단종이 영월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당시 엄흥도는 영월 지역의 호장인 하급 관리에 불과하다.
호장의 평소 주된 업무는 백성이 사는 집을 파악하여 세금을 매기고 거둬드리는 일이다. 그렇게 본다면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내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보인다.
그렇지만, 단종은 1455년 숙부인 수양대군으로부터의 안위를 위협하는 겁박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으로 전락한 뒤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 온 것이다. 이렇듯 유배 온 ‘노산군’의 일상을 감시 보고하는 역할이 호장 엄흥도의 가장 큰 공무이기도 했다.
단종의 유배 생활 5개월 만에 천륜을 범하는 세조의 명으로 조카 ‘노산군’에게 사약을 내려 왕을 참혹한 죽임에 이르도록 했다.
열일곱 나이에 생을 마감한 단종의 죽음은 ‘왕자의 난’보다 더 악랄하고 표독스러운 조선왕조의 역사적 비극이며 사건이다.
이렇듯 죽임을 당한 1457년 음력 10월 21일, 단종의 시신은 영월 동강에 버려졌다.
그러면서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할 것이다’라는 세조의 간악한 어명까지 내려졌다.
후환이 두려워서 그 누구도 강물에 버려진 시신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흥도는 어명이나 어떤 두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부모를 위해 마련해뒀던 관을 가지고 아들 셋과 염장하여 풍설이 몰아치는 밤 선영인 동을지산(冬乙旨山) 따뜻한 명당에 안장하였다.
이때 엄흥도의 친족들이 혹여라도 화를 입지 않을까 두려워 만류하여도 엄흥도는 말하기를 ”위선피화(爲善被禍) 오소감심(吾所甘心)이라“ 했다. 즉 ”옳은 일을 하고도 화를 당하는 것은 내가 달게 받겠다“라는 뜻이다. 얼마나 대담한 말인가. 인조 때 문신 나만갑이 기록한 ‘병자록’ 속 내용이다.
숙종실록에도 ”영월 호장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산골짜기에 안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곳이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있는 지금의 단종 능 장릉(莊陵)이다.
이런 과단성과 용기 있는 모습에 후세 사람들은 그를 충절의 상징으로 여기며 추앙하고 있다.
단종의 장례를 마친 후 엄흥도는 호장을 내놓고 세조나 그 측근들의 보복을 피해 아들 셋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첫째 아들 호현(好賢)은 문경으로, 셋째 아들 성현(聖賢)은 강원도 안변으로, 그리고 본인과 둘째 아들 광순(光舜)은 이리저리 피해 영남지방을 헤매다가 은거하기에 적합한 옛 의흥현 화본 조림산에서 일흔한 살까지 세상을 등지고 고달픈 삶을 살았다 하니 마음이 무겁고 가슴이 아프다.
여러 야사에는 그의 후손들이 성(姓)까지 숨긴 채 충남 공주와 경북 예천 등을 거쳐 울산 언양의 깊은 골짜기로 스며들었다.
고결한 영월 엄씨 가문의 고난의 삶, 은둔 생활은 1698년 숙종 24년 11월 단종이 조선 제6대 왕으로 복위되고 엄흥도의 공훈이 인정받기까지 근 200여 년간 계속됐다.
단종이 복위되자 엄흥도 등 그와 관련된 인물들 역시 충절의 상징으로 재평가 되었다.
18대 현종 때 송시열의 건의로 그의 자손들이 관리로 등용되고, 19대 숙종 때는 엄흥도를 공조참판으로 추증했다.
또 제21대 영조 때 그의 충의를 기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사육신과 김시습 등의 위패가 모셔진 유서 깊은 영월 창절사(彰節祠)에 함께 배향되어 그의 충의를 인정받게 되었다. 훗날 23대 순조 때는 지금의 장관급인 공조판서 벼슬이 내려지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엄흥도의 궤적을 담은 흔적은 있지 않으나, 여러 민간 연구단체나 야사에서는 엄흥도가 은거한 지역으로 영월, 청주, 군위 등 여러 곳으로 전해지는데 특히 택민국학연구원에서 발행한 국학연구론총 제3집에 수록된 ‘충의공 엄흥도의 삶과 묘소 진위에 관한 고찰’ 논문에서 여러 가설을 적시하며 군위군에 은거하다 생을 마쳤음을 밝히며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 산108번지에 있는 묘소가 엄흥도의 진묘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한다.
‘왕과 사는 남자’의 영화 상영을 계기로 ‘비운의 왕 단종과 엄흥도의 삶’에 대한 열기가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근간 발행된 군위신문사의 취재 내용이나 영월 엄씨 군위군 문중 후손들이 ‘충의공 엄흥도 군위군 진묘 성역화 제안 고함’ 이란 행사를 연 것은 뒤늦은 감은 없지 않으나 후손 된 도리를 찾는 것 같아 반가운 일이다.
차제에 충의공 엄흥도의 신념과 의리, 과단성 있는 삶의 철학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공론의 광장이 전국적으로 펼쳐지기를 엄씨 문중 후손들 못잖게 필자도 기대하고 있다.
필자는 ‘비운의 임금 단종과 충의공 엄흥도’란 제목으로 3년 전인 2022년 11월 3일 군위신문사에 기고한 바 있다.
당시의 기고문 내용을 요약하면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에는 충의공 엄흥도의 발자취가 역력하다. 그런고로 역사적 고증을 잘 다듬어 충절의 사표로서 교육적 차원의 관광순례지로 선정하여 의흥 금양리 영월 엄씨 문중에서도 협력하고 군위군이 앞장서서 엄흥도의 불굴의 정신을 후세에 널리 알렸으면 하는 출향인의 제언을 한번 숙고해 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지금도 충의공 엄흥도의 빛나는 충절을 기리는 충정은 그때나 여전하다. (2부 끝)
황성창 시인
수필가 재부군위군향우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