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인물 사람들

인물열전-마지막 한학자 정규동 옹을 만나다

admin 기자 입력 2014.07.17 16:39 수정 2014.07.17 04:39

세월의 역경 딛고 한학 발전에 일생 바쳐
성균관 전의·군위유도회장·향교 전교 역임
군위향교지 제작 발간, 역사교육사업에 헌신

ⓒ N군위신문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비롯한 첨단기기가 판치는 요즘 시대에도 여전히 한학을 고집하고 꼿꼿한 선비정신을 이어가는 이가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효령면 금매리의 동은(東隱) 정규동(鄭圭東·85세·동래정씨 31세손)옹.(왼쪽사진)

본지 발행인이 정 옹을 만나러 가는 날에는 장마가 막 시작되던 날이었다. 가뭄에 시달리던 산천이 밤사이 내린 비로 촉촉이 젖어있었다.

정 옹의 집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그는 벌써 나와 골목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규동 옹은 성균관 전의와 군위군유도회장, 군위향교 전교를 역임한 군위와 영남지역에 몇 남지 않은 한학자이자 유학자다.

큰절로 인사를 하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정 옹은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노경(老境)과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을 했었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터뷰 내내 자세를 흩뜨리지 않은 채 낭랑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규동 옹이 한학의 처음 접한 것은 그의 중부(仲父)에게 서다. 13살까지 중부에게서 한학을 배운 후 6학년으로 효령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그 후 한학을 평생의 학문으로 섬기고 있다고 했다.

평생을 공부하고 아직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서일까. 정 옹의 기억력은 놀라웠다. 도대체 그 많은 한자들을 어떻게 익히고 어려운 고서들은 얼마나 공부해야 줄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걸까.

천자문 중에 아는 글자를 손으로 꼽아야 할 정도인 한글세대에게 정규동 옹의 모습은 무척이나 경이롭게 보였다.

정규동 옹은 전교(典校)와 유도회장(儒道會長) 그리고 동래정씨(東來鄭氏)문중의 이사 시절에 향교와 유림, 문중의 크고 작은 행사를 거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인근지역인 현풍 도동서원, 안동 병산서원, 구미 동락서원, 의성 덕양서원, 대구 경의제, 완담서원 등에서 망지(望紙)를 받고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을 맡기도 했다.
↑↑ 대성전 헌작
ⓒ N군위신문

특히 정 옹은 군위향교 전교 시절에 유림의 화합과 군위향교를 인성교육의 산실로 만들기 위해 매진했었다. 공부가 인격을 연마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선생은 옛 선현들의 글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는 온화하고 스스로에게는 엄격(待人春風 持己秋霜)하기 위해 노경인 지금도 노력한다고 했다.

그래서 정 옹은 군위향교지(軍威鄕校誌) 제작과 발간에 열정을 갖고 임했다. 향교지는 향교의 역사와 교육사업을 집대성한 책이기 때문에 발간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정 옹은 “향교지 발간을 계기로 유림이 화합하고 단결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발간에 온 힘을 쏟았다.

그렇게 6백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군위향교의 교지가 지난 2004년 6월 15일 발간됐다. 교지에는 윤리선언문, 실천강령, 행동강령을 책머리에 두고 관계관들의 축사와 사진을 곁들어 편집됐다.

특히 교지에서는 군위향교의 현황, 연혁, 역할, 향교중수기, 향교현판문, 향교재산, 향교서적, 제기, 기타자료 등 실제 군위향교와 관련된 모든 자료들이 집대성됐다.

이런 노력이 돋보여 구미 인동향교에서 군위향교를 찾아와 견학을 하기도 했다.

한편 군위향교는 조선 성종 1년(1470) 동부리 마정산에 처음 지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40년(1607) 하곡동으로 옮겨 지었다. 그 뒤 숙종 27년(1701) 지금 있는 자리로 다시 옮겨 지었다.

현재 군위향교 대성전에는 중국의 유학자 공자, 인자 등 9명과 설총, 최치현 등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한학뿐만 아니라 문예에도 조애가 깊은 정규동 옹은 지난 2001년 6월 <東隱稀詩集>을 발간했다. <東隱稀詩集>은 정 옹이 고희(古稀)를 맞아 낸 축하시집으로 본인의 시 70수와 전국 유림에서 보내온 축하시 124수를 합해 간행했다. ‘東隱’은 정규동 옹의 아호로 그가 직접 지은 것이다.

정 옹은 “지금은 한학이 외면 받고 있지만 영영 없어질 순 없다고 생각해. 한학은 우리 인간에게 꼭 필요한 학문이거든. 내가 한학을 연구하고 전수하는 이유는 빛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야.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 때문이지.”

전통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관건은 당연히 옛 기록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오늘날 옛 기록을 자유롭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많은 옛 기록도 단지 종이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은 전통방식으로 한문을 배운 정규동 옹 같은 원로 한학자들이 한학의 맥을 이어가는 마지막 시기이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한학이 결코 고루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사회가 각박해질수록 우리 선현들이 남긴 글을 통해 공경과 배려를 본받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 곡부 공자묘전
ⓒ N군위신문

정 옹과 인터뷰를 하면서 아이들이 어릴 때 함께 고궁이나 서원을 몇 번이가 가봤는지 떠올려 봤다. 한문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아이들의 물음에 답을 해줄 수 없어서 부끄러워되려 피했던 모습이 생각이 났다.

최근에 건강을 해치면서 하나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는 정 옹은 “앞으로 망지를 해달라, 고문서를 해석해 달라, 전통의식 절차를 가르쳐 달라는 이들의 부탁을 선뜻 해줄 수 없었을 같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어쩌면 우리는 좋은 길잡이를 잃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훗날 누가 그를 대신해 ‘지표’와 ‘이치’를 가르쳐 줄 것인가. 이 어르신의 몸에 밴 학식과 정신을 어떻게 기록하고 보존해야 할지 그것 또한 우리의 숙제다.

한편 정규동 옹은 효령초등학교 3회, 명륜고등공민학교 졸업. 공군 17기(5년)를 마쳤다.
가족으로는 부인 故김귀출 여사와 슬하에 2남3녀를 두고 있으며 장남 정권현씨는 조선일보 취재부장, 차남 정현석씨는 외환은행에 근무하고 있다.

‘新錄’
節序分明草木知
절서가 분명함은 초목이 아나니
鮮妍新錄繞山陂
선연한 신록 산비탈을 둘렀도다
良辰淑景連雲㞱
양진에 좋은 경치 구름 산을 연하고
暖日淸嵐起柳池
난일에 맑은 물 놀 버들 못에서 일도다
騷客他鄕花影惜
소객들 타향에서 꽃그늘 애석하고
牧童歸路草風吹
목동들 돌아가는 길 초풍이 불도다
看山渡水烟光好
산을 보며 물을 건너 연광이 좋으니
步步快淸步步詩
걸음마다 상쾌하고 걸음마다 시로다.

<東隱稀詩集> 중에서.


저작권자 N군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