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인물 독자마당

春雪

admin 기자 입력 2018.04.18 21:32 수정 2018.04.18 09:32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춘설이라 하기에는 어색했다. 절기상으로 우수 경칩 춘분이 지난 지가 삼십여 일 지났다. 겨울답지 않게 이른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제법 많이 쌓였다.

천진한 복실이는 꼬리를 치켜들고 살랑거리며 내리는 눈꽃 따 먹으려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혀를 날름거린다. 흩날리는 눈꽃에 주체를 이기지 못하고 멀쩡한 하늘만 쳐다보고 컹컹 짖어댄다.

눈을 치우다 허리를 펴고 하늘을 쳐다본다. 눈꽃 한 이파리가 하느작거리며 내 얼굴에 살포시 앉았다. 억센 손으로 조심스레 잡으려 하는데 그만 얼굴에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떠나기 싫어하던 겨울을 억지로 떠밀어 보냈더니만, 속상했던지 또 찾아와 애타게 했다.

춘설이 분분한 야경은 멋있고 아름답다. 계절도 잊어버린 듯 눈은 끝일 줄 모르고 펑펑 내린다. 가로등에서 비치는 불빛은 눈꽃 속에 파묻혀 어스름한 밤을 더욱 깊게 빠져들게 한다.

새벽 기도 가는 사람들 미끄러질라.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조심스레 걸어가는 모습이 곡예 하는 것 같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던 차 한 대가 미끄러져 오도 가도 못 하고 난감한 표정 지으며 우두커니 서 있다. 날이 밝자 아름다웠던 무대의 막을 내리는 징 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설 중에 핀 매화와 같이 산과 들에는 추운 겨울을 이겨낸 꽃망울들이 여기저기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더없이 아름다운 세상 무릉도원이 또 있으랴! 시기하고 심술궂은 난폭자처럼 춘설이 이를 가만히 두질 않고 한숨에 삼켜버렸다. 느닷없이 찾아온 춘설에 깜짝 놀란 나무들은 몸을 움츠리고 벌벌 떨고 있었다. 저 멀리서 짖어대는 개의 울음소리에 한 가닥 위로를 받으며 기지개를 켜고 가지 위에 걸터앉아있는 솜옷들을 하나둘 벗어 버리기 시작한다.

하얀 눈 속에 파묻힌 농장에서 소 울음소리와 개가 짖어대는 소리가 들린다. 소는 우둔하고 묵직하지만, 개는 민첩하고 지혜로웠다. 개의 지능은 사람으로 2~3살 정도이다. 7살짜리 정도 되는 것도 있다. 후각이 발달하여 1㎞ 이상 떨어진 곳에서 암캐가 발정을 시작하면 냄새를 맡고 암캐 한데로 달려갈 정도로 발달하여 있다. 시력은 근시안이라서 먼 곳에 있는 사물을 잘 볼 수 없는 것이 흠일지도 모른다.

춘설이 흩날리던 어느 날, 개는 봄 바람난 처녀같이 가만히 있지 못한다. 수북이 쌓인 눈을 이불 삼아 그 위에 덜렁 누워 이리저리 뒹굴어 본다. 벌떡 일어나 몸을 부르르 떨며 몸에 묻은 눈을 털어낸다. 멋쩍은 듯 나한테로 달려왔다.

또 눈 위에 덜렁 누워 구른다. 하얀 눈이 얕은 바람결에 나풀거리며 내리는 것을 보고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고 컹컹 짖어댄다. 세상에 태어나고 처음으로 봄을 만끽하는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말은 할 수 없을지라도, 눈을 보고 저렇게 좋아하는 심성을 알아내지 못하고 지내온 과거를 뒤돌아보며 씁쓸해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씁쓸한 것은 내 직업이 수의사라는 것이다.

하루가 멀다고 눈이 또 내리붓는다.
온 천지가 하얀 물감으로 도배했던 것처럼 아름답다. 소 우리 곁에 매어둔 개가 없어졌다. 목에 감긴 끈을 날카로운 이빨로 끊고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눈 위에 찍혀있는 개 발자국 따라 찾아갔다.

4~500m쯤 떨어진 어느 집 대문간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집 없는 개처럼 처량하고 불쌍하게 보였다. 누가 개를 만들었던지 1㎞밖에 있는 암캐가 발정한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해서 이 꼴 이 모양이 되었다 하며 푸닥거리했다.

개는 나를 보고도 본척만척했다. 죽으라고 그 집 대문만 쳐다보고 있다. 목에 달린 목줄을 당겨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눈 위에 그려진 개의 열정적 사랑의 흔적을 보고 놀랐다. 개 코가 밝다 밝다 해도 너무 밝은 것도 탈이다. 하며 중얼거렸다.

느닷없이 찾아온 춘설이라 하지만 복실이 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었을 게다. 개의 발정기는 주로 봄·가을이다. 개가 발정할 무렵 하늘에서 축복을 내려주시는 듯 하얀 눈을 내려주셨다. 흩날리는 눈꽃 따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코로 냄새를 맡으며 하늘은 쳐다보며 컹컹 짓는 모습은 너무나 순진해 보였다.

떠나가기 전, 마지막 춘설을 맞아 복실이는 춘설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무대를 꾸몄다. 무희가 춤을 추듯이 은빛 나는 눈을 온몸에 휘두르고 아름다운 춤을 너풀너풀 추었다. 손뼉 치고 흥분과 기쁨에 넘쳐 황홀에 빠졌을 때 어디에선가 축하가 들려온다. 서로가 손을 잡고 이 한해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내년에 다시 기쁜 마음으로 만날 것을 약속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대구가축병원 원방 권춘수


저작권자 N군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