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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잔인한 오월

admin 기자 입력 2018.06.15 09:42 수정 2018.06.15 09:42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결국, 눈덩이처럼 쌓였던 과로와 피로가 곪아 터졌다.
화가 치밀어 오른 병마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몸 구석구석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한순간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렸다. 생존을 위한 인간의 본능일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에서 하루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삶의 여정은 변함없었다. 개원 반세기 지났음에도 지금도 생업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었다. 시간이 날 데리고 저만치 갔어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시간을 투자할 때마다 나의 직업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느꼈다.

오월답지 않게 아침저녁으로는 콧등이 시릴 정도로 쌀쌀했다. 깊은 잠에 빠져있던 전화벨 소리가 이른 새벽 공기를 가르면서 아침을 깨웠다. 초저녁부터 송아지 낳을 준비하던 어미 소가 밤새껏 낳지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다 하며 지인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생각할 틈도 없이 구불구불한 산길 따라 부지런히 달렸다.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던 목장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 햇살이 오색 무지개를 타고 목장 안을 넘나든다. 우아하고 신비스러운 광경에 한참 동안 넋을 잃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소를 관찰했다. 밤새껏 진통과 고통으로 지쳐버린 어미 소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서는 네발을 쭉 펴고 온 전신을 내게 맡겼다.

자궁 속에 있는 송아지 생명이 걱정되었다. 긴장과 흥분이 밀려왔다. 조심스레 자궁을 검사했다. 자기 스스로는 도저히 낳을 수 없는 상태였다.

물리적으로 처치하지 않고는 할 수 없었다. 자궁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송아지 앞다리를 조심스럽게 쇠사슬로 묶었다. 송아지는 계속 발버둥 쳤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플까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당겨 내어야 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참고 간신히 세상 밖으로 빠져나온 송아지는 머리를 흔들며 콧방귀를 낀다. 가슴을 헐떡이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한다. 어미 소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얕은 신음 하면서도 평화로워 보였다.

훈풍에 꽃피고 새우는 계절 오월 가축들이 분만하고 수정하는 좋은 계절이다. 그런데도 날씨는 고약하게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름 없는 바람이 매섭게 불고 쌀쌀했다.

세상모르고 갓 태어난 어린 송아지는 쌀쌀한 추위에 기겁했다, 반지르르한 코에서 콧물이 뚝뚝 떨어진다. 양수가 채 마르지 않아 몸은 물에 빠진 것 같았다. 어찌할 바 모른 송아지는 옴짝달싹 않고 그 자리에서 벌벌 떨며 멍하니 서 있다. 눈망울은 초롱초롱했지만, 아직 여려 보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햇살도 견뎌야 했다. 볼수록 가엽고 불쌍했다. 어린것이 무슨 죄가 있기에 추위와 고통으로 이러한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이보다 더 잔인한 달 또 있을까 생각했다.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난산을 처치한 다음 날에는 과로와 피로로 녹초가 되어 기진맥진했다. 어제도 오늘도 늘 그랬다.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견디며 묵묵히 지냈다.

어느 한 날 생각지도 않던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허기지고 탈진된 상태로 난산 처치하러 갔다. 처치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걸음걸이가 휘청거렸다. 등이 오싹하고 온몸이 떨리며 고열 두통 오한이 드는 것 같았다. 밤이 깊어지자 더욱 심했다. 밤 11시경 서둘러 대구로 갔다. 담담한 심정으로 진찰을 받았다. 며칠 입원했어도 차도가 나질 않았다.

혓바닥이 까칠하고 퉁퉁 부어올랐다. 혀뿌리까지 부어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숨도 겨우 쉴 정도였다. 죽음을 두렵지 않게 생각했다. 막상 죽음 앞에서는 부질없는 헛말이 되어 버렸다. 생명이 고귀함을 절실히 느꼈다.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구급차 타고 종합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

다시금 병원의 존재감을 실감했다. 가까스로 응급실 한쪽 귀퉁이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환자에 대해 의료진들이 신속하고 정확한 처치에 긴장된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정신이 들고 숨도 쉬기가 약간 수월했다. 주위를 살펴볼 여유마저 생겼다.

한밤중 응급실에 난데없던 진풍경이 벌어졌다. 무슨 사연인지 링거 꽂은 한 환자가 고함을 지르며 링거를 빼버리고 난동을 부렸다. 4~50여 명 되는 환자가 그쪽으로 눈이 쏠렸다. 간호사들이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선임 간호사가 수습했다. ‘모든 것 제 잘못입니다.’ 하며 머리 숙여 정중히 사과했다. 시끌시끌하던 응급실이 금세 조용하고 숙연해졌다. 선임 간호사의 지혜와 진정한 사과 한마디에 환자들은 모두 놀랐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다.

응급실에서 입원실로 옮겼다. 안정된 마음으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첫날부터 체온 혈압 혈당 맥박 등등 기초검사가 시작되었다. 며칠이 지나자 병실 생활에도 적응되고 흐릿했던 정신도 조금씩 맑아졌다.

회진할 때 교수님 눈치만 살폈다. 언제 퇴원하십시오. 하는 말을 듣고 싶었다. 생각하면 이루어진다는 말 있듯이 어느 요일 아침 교수님께서 퇴원해도 되겠습니다. 라고 했다. ‘퇴원’이란 말 한마디에 죽어가던 나뭇가지에 생명의 꽃이 다시 피는 것 같이 기분이 좋았다.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 할지라도 체력의 한계는 뛰어넘을 수 없었다. 과로와 피로로 얼룩진 내 모습이 너무나 비참하고 초라했다.

계절의 감각을 잊어버린 체 아직도 봄 인양 잃어버린 계절의 여왕 5월을 찾으려 헤매었다. 즐겨 입던 오리털 패딩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감정과 이성 그리고 내 전신을 송두리째 앗아간 잔인한 오월.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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