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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화 기획/특집

군위의 “큰 어른, 참스승” 최해호 전 교장 타계(향년 94세)

admin 기자 입력 2018.08.19 19:54 수정 2018.08.19 07:54

교육계의 큰 별… 한 평생 교육과 향토문화 발전을 위해 헌신

↑↑ 최해호 전 교장
ⓒ N군위신문
43년간 교단에서 후진 양성 헌신
퇴임 후 향토 문화 창달 왕성한 활동
노년기 독립적, 주체적인 노인상 정립


누군가에게 본(모범)이 되는 스승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존경받기는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올바른 깨우침을 줄 수 있는 큰 스승은 존재한다. 스스로의 모범을 통해서 후진들에게 바른 행동을 촉구해 내는 분 말이다.

지난 9일 지역의 큰 스승이셨던 최해호 전 교장 선생이 노환으로 타계하셨다. 향년 94세.
고인은 올곧은 지식인이자 교육자로 시대와 지역의 원로이자 참 스승이었다.

그러기에 고인의 타계는 슬픔이며 큰 손실이다. 이제 고인을 떠나보내며 공인으로서 그가 남긴 자취들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고인은 1924년 2월 16일 경북 구미시 해평면 금산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였던 1941년 3월 조선총독부 전기기술원 양성소를 졸업해, 같은해 4월부터 1945년 4월 20일까지 압록강 수력발전소 공사에 전기기술자로 일했다.

◇ 43년간 사도의 길 걸어

이후 고인은 1946년 3월 대구사범학교 연수과를 졸업해 같은해 9월 초등교원 채용시험에 합격했다.

1947년 5월에 교원 제3종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국민학교 정교사 자격증, 국민학교 1급 정교사 자격증, 교감·교장 자격증을 차례로 취득했다.

고인은 1946년 10월 해평국민학교에서 교사로 교육계에 발을 디딘 후, 지난 1989년 3월 군위군 소보면 송원초등학교 교장직을 끝으로 정년퇴임하기까지 대구시를 비롯 경북 선산군, 군위군, 영주시에서 43년간 교육계에 헌신해오며 지역의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고인을 아는 모든 이들은 “고인은 ‘인재양성 만이 지역을 살린다’는 일념으로 교직을 천직으로 여겨온 참 교육자였다”며 “지역이 인재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요즘, 고인의 숭고한 교육관을 후배 교사들이 본받아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이라고 애도 했다.

고인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교육에 대한 열정과 소신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는데 열정을 다했으며, 특히 ‘정직 · 근검 · 사랑’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교사와 교육행정요원이 부족했던 해방과 현대화 무렵, 그의 교직생활은 한국과 대구경북 교육의 기틀을 잡는 험난한 과정이었다. 그래서 특히 교사로서, 교육행정가로서 고인의 역할은 당시 교육계에 크게 돋보였다.
↑↑ 최해호 교장선생은 지난 1989년 3월 군위 소보 송원초등학교 교장 직을 끝으로 정년퇴임 했다.
ⓒ N군위신문

교사, 교감, 교장을 거치는 동안 성실하고 솔선수범하는 평소의 교직생활자세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제자들에게는 훌륭하고 존경받는 스승상을 실천으로 보여주었고 교사들에게는 친근한 동료로서 모범이 되었으며 교육행정가로서는 능력과 청렴을 인정받았다.

고인은 가난한 시대에 성장하고 공부하면서도 꿈을 잃지 않고 삶을 긍정적으로 개척했다. 그는 아이들이 따뜻한 사회의 행복한 주인공이 되기를 소망하며 인성과 효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며 초등교육에 헌신했다.

그렇기에 고인은 많은 사람들의 사표였으며, 젊은 제자들에게 역할모델을 제공해 주던 우람한 나무였다. 그의 그늘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추스르고, 학문의 길을 걸으며 빗나가려는 자신의 욕망을 누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를 인생의 스승이며 사표로 삼고자하는 이들이 그치지 않았다.

◇ 효·향토문화 창달에 이바지

고인은 앎과 삶이 일치한 지식인이자, 절제와 품격을 갖춘 ‘어른’이었다. 특히 우리나라 전통시대 이래로 계속되어 오던 선비의 정신을 지켜준 분이었다.

고인은 자신의 신념을 보다 넓은 세계에 전달하기 위해 퇴임 후, 향토 문화 창달과 충효교육에 힘썼다.

그는 성균관유도회 군위군지부 회장과 군위향교 전교를 맡으며 지역 유림의 귀감으로 전통사상과 문화의 전승 발전에 족적을 남겼다.

고인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근간인 유교문화 확산을 통한 인간성 회복과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전통을 계승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 이외에도 지역 문화의 뿌리힘을 기르는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 노인권익 향상위한 봉사주력

고인은 별세 전까지 노인 권익 향상에 힘썼다.
그는 대한노인회 군위군지회장, 대한노인회 경북연합회 감사, 그리고 군위기로회 회장을 맡으며 부양받는 노인이 아니라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노인상을 확립하는데 노력했다.

고인은 노인건강과 복지향상 등 봉사에 주력하며 특히, 노인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했다.

그래서 고인은 노년은 낡은 것으로 보지 말고 익어가며 완성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노인들이 노년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늙음은 아름답고 멋지다고 스스로 자부하며 남을 도우며 스스로 즐기고 행복한 삶을 보낼 수 있도록 힘썼다.

◇ 그가 남긴 스승의 길 어른의 길

인류와 사회, 모든 조직의 생성에서 성장, 발전, 성숙에 이르기까지 성패를 결정짓는 요체가 바로 교육이라고 한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오로지 교육에 달려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 더욱 참스승의 모습이야말로 우리의 앞날을 열어주고 지켜주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故 최해호 선생은 ‘사부일체(師父一體)’였다. 교단에서 삶의 본을 스스로 보여주며 ‘제자를 향한 조건 없는 사랑’으로 인성교육을 실천했다. 그리고 단순히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먼저 경험하며 체득한 경륜과 삶의 지혜를 가르쳤다.

교육의 본질 목적은 홍익인간! ‘사람을 사람답게 키워주는 것’이다. 고인은 그렇게 43년간 사도를 펼치며 스승의 길을 걸었다.

퇴임 후에는 향교 전교와 노인회장, 군위군기로회 회장을 맡으면서 군위지역 문화 창달과 충·효 교육을 위해 매진하며 제2의 인생을 꽃피웠다.

세상을 만들고 사람을 바꾸는 것이 교육이라 여겼던 고인은 교단에 있을 때도 떠나서도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참교육을 실천하며 교육인재 육성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왕성한 활동을 통해 고인은 지역의 ‘큰어른’, ‘참스승’으로 세간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다.

특히 군위군 표창장, 교육감 표창장, 대한교육연합회 표창장, 군위군 교육장 표창장, 경북교육회장 표창장, 대통령 면려상, 문교부 장관상, 국민훈장 동백장, 경북도지사 표창장 등의 수상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고인이 얼마나 후학과 지역을 위해 헌신했는지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추모의 글을 쓰면서는 그 떠난 이를 회상하며 슬퍼하는 마음이 앞서게 마련이다. 그러나 故 최해호 전 교장 선생의 죽음 앞에선, 우리는 그의 떠남을 슬퍼하기보다는 우선 그 삶의 완성에 감탄하고 부러움을 느끼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는 구십 평생을 참선비이며, 스승으로 살았다. 이 때문에 그를 아는 사람이나 제자들은 그 삶의 크기에 감격하면서 그를 더욱 그리게 된다.

고인은 뙤약볕에서는 커다란 나무의 그늘같이 비가 올 때는 넓은 우산처럼 큰 격려와 힘이 되고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주었던 분이었기에 그의 타계는 지역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식견, 철학을 가진 고인의 뜻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더불어 내 삶의 완성을 향한 그의 모범들을 결코 잊지 않기를 다짐하고자 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병선 여사와의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다.

(글·편집 사공화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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