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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군위 소보 청화산 법주사

admin 기자 입력 2022.09.19 23:00 수정 2022.09.19 11:00

사찰 1500여년전 신라 소지왕 15년(493)에 심지국사 또는 은점조사가 창건

↑↑ 법주사 전경
ⓒ N군위신문

↑↑ 권춘수 작가
ⓒ N군위신문
사람에는 이름이 있다. 생년월일은 달라도 같은 이름이 있다. 같은 이름이라도 한글로 쓰면 같아도 한자로 쓰면 다르다. 사찰에도 창건 연도는 달라도 같은 이름이 있다. 속리산 법주사와 청화산 법주사가 있다.

법주사 하면 보은 속리산을 떠올리는데, 우리 고장에도 오층석탑과 보광명전으로 유명한 천연 고찰 법주사가 청화산의 동남쪽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보은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주자는 살 주(住) 이고, 소보 청화산 법주사(法柱寺) 주자는 기둥 주(柱) 이다.

때로는 사람들의 심리가 묘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남의 밥에 든 콩이 더 굵어 보인다는 속담이 있다. 지나친 욕심을 두고 한 말이다.

한때는 나도 과욕을 부렸던 때가 있다. 우리 집에 귀중한 보물과 보석을 산더미 같이 쌓아 두고, 남의 집에 있는 보물이 더 좋게 보이는 것 같아 배알도 없이 그것을 찾으려 세상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덧없는 세월을 보냈다.

왜 그랬냐? 고 묻자, 궁색한 답변에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뭇사람들이 세상 밖에 나가면 내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내 것이 제일 소중하고 귀중한 줄 모르고 허영과 허풍에 가득 찬 눈으로 남의 것이 좋다는 말에 눈독 들이고 허송세월 보냈다는 것이 이유였다.

살다 보면 부질없는 욕심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자기중심을 잃으면 겉은 멀쩡하면서 속은 텅 빈 허수아비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뚜렷한 생각이나 주장도 없이 남의 말만 듣고 따라가는 부화뇌동처럼 세상이 흘러가는 물결 따라 흘러갔던 것이 잊을 수 없는 과오였다.

자성하며 보물과 보석이 가득한 청화산 법주사를 한 번 찾아가 보려고 마음먹었다.
불볕 쨍쨍 내리쬐는 어느 여름. 청화산 법주사를 찾아 길을 나섰다. 법주사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삼사십여 채 되는 동네가 있다. 동네 이름은 달산리다.

이 동네에 반세기 넘도록 가축 예방 진료하면서 집집이 다녔던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도로에서 4, 5km밖에 안 되는 법주사에 개(犬)를 진료하려 가본 적 이외는 한 번도 없었다. 늘 가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오늘에야 찾아볼 수 있게 되어 마음이 한결 가볍다.

몇 해 전만 해도 이 동네는 살기 좋기로 이름난 부촌이었다. 주막에서 흘러나오는 컬컬한 막걸리 소리며 정미소에서 나락 빻는 소리가 밤새껏 울어댔다.

지금에 와서 세월에 못 이긴 탓인지 정미소는 폐허가 되었고 쓸쓸한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 있다.

양철 지붕은 군데군데 구멍이 나 비가 오면 빗물이 금방이라고 정미소 안으로 쫓아 들어갈 듯하다. 벽은 비바람에 허물어져 곧 쓰러질 것 같고, 정미소에서 나락 빻던 요란한 소리는 이곳을 떠난 지 오래된 것 같다.

동네는 숨소리 하나 없고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텅 빈 집들만 동네를 지키고 있다.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지난날의 화려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고요와 적막감이 흐르는 텅 빈 동네를 빠져나간다. 갑자기 오싹하고 머리가 삐쭉삐쭉 서고 무서운 기가 든다. 오금아, 날 살려라! 하며 가속 페달을 정신없이 밟았다.

법주사 가는 길 양편에는 계단식 논이 있었다. 길 따라가면 벼가 무성하게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밭으로 변해 버렸다. 그 자리에 자두, 복숭아 등이 빨갛게 익어가며 가을을 재촉하고 있었다.

법주사 가는 길이 그때보다 더 아름답고 우아해 보였다. 길은 넓고 아스콘으로 깔아 가기가 훨씬 더 편하고 좋았다. 에어컨을 최고로 높여도 차 앞 유리창은 뜨거운 햇볕에 식을 줄 모른다.

어디쯤 왔을까? 청화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법주사 용마루에 올라앉은 이문( )이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간간이 보였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되겠다는 생각에 기대가 크고 마음이 설렌다.

법주사가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고색창연한 일주문이 반긴다. 여기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수십 대 자동차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 입구에는 작은 회색 컨테이너 안내소가 있다. 더위가 만만치 않았다. 차에서 내리니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안내소까지 걸어가는데 숨이 턱턱 막힌다. 해설사 한 분이 친절히 마중해 준다. 컨테이너 안에 들어서니 에어컨이 더위를 식혀 준다. 해설사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절에 관한 이야기를 조곤조곤해 준다.

법주사는 불맥을 면면히 이어온 천년 역사와 정취를 간직한 유서 깊은 절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은해사의 말사로 1,500여 년 전 신라 소지왕 15년(493)에 심지국사(心地國師) 또는 은점조사가 창건하였다.

인조 원년(1623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현종 원년(1660)에 중건했다. 그 후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약 300여 년 전에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법주사는 최근에 보광명전은 1999년, 일영당 2001년, 육화당 2001년, 명부전 2005년, 산신각 2005년, 청화선원 2011년, 설선당 2011년, 화엄실 2014년, 일주문 2015년, 보광루 2016년 등을 신축하면서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속리산 법주사보다 규모는 작지만 천년 고찰답게 중요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5층석탑이 문화재자료 27호(1985)로 지정되었으며, 국내의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크기의 왕맷돌이 민속문화재 112호(1995)로 지정되었다.

보물 제2005호로 지정된 괘불도(掛佛圖)가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35호로 지정된 보광명전 등 다양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문화재를 살펴보면 역사적 의미와 문화적 가치가 높다는 거를 짐작할 수 있다. 괘불도(掛佛圖)는 그림으로 그려서 걸어 놓은 부처의 모습이다.

숙종 40년(1714) 수화승, 두초 등 여러 화승이 그린 불화로 유명하다. 총 16폭의 비단을 이었고 가로 4.54m 세로 7.12m에 달하는 장대한 크기로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이 보관(寶冠)을 쓰고 연꽃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연꽃 대좌 위에 서 있는 거대한 불화(佛畵)이다.

부처님 오시는 날, 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오기를 기도하는 기우재 등 불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괘불도를 대웅전 앞 괘불대에 걸어놓고 법회를 하곤 한다.

지난해와 저지난해와 올해도 코로나 펜데믹으로 법회를 열지 못했다.
신경을 곤두세워 괴불을 들여다보았더니 피로가 찾아온다. 이마에 맺힌 땀이 줄곧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등줄기 타고 내리는 땀이 바짓가랑이를 타고 내려 구두 속이 흥건하다.
걸음을 걸으면 철벅 철벅 소리가 박자를 맞춘다.

여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국내에서 제일 크다는 왕맷돌을 보러 간다. 피로하면서도 왕맷돌 본다는 설렘에 더운 줄 모르고 헐레벌떡 바쁜 걸음으로 걸어간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2호(1995)로 지정된 왕맷돌은 묵직하고 당대의 솜씨를 자랑하고 식생활에 유용하게 쓰였던 것 같다.

맷돌은 둥글고 넓적한 윗돌과 아랫돌이 서로 포개어 팥, 콩, 메밀, 녹두 등의 곡식 낱알을 윗돌 구멍에 넣고 손잡이로 돌려 곡식을 곱게 갈아서 가루를 만드는 도구이다. 50여 년 전 절 남쪽 200m가량 떨어져 있는 밭두렁에 반쯤 묻혀있던 것을 지금의 법주사 자리로 옮겼다. 장골이 20여 명이 겨우 옮겼다고 할 만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맷돌이다.

왕맷돌의 크기는 윗돌, 아랫돌 모두 지름이 115cm 두께 15.5cm이다. 윗돌에는 8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윗면 중앙에 수직으로 뚫은 4개는 곡식 낱알을 집어넣는 구멍이다.

윗면과 옆면을 통하게 뚫은 구멍 4개는 여러 사람이 윗돌을 돌릴 때 손잡이를 설치하려고 만들었다. 윗돌을 돌릴 때는 십여 명이 달라붙었다고 한다.

소 4마리가 돌리기도 했다고 한다. 맷돌을 만든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맷돌로 사찰의 규모와 사찰의 식생활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곡식을 갈아서 가루로 만든 것을 가지고 3,000여 명이 먹었다고 한다. 절의 규모가 대단히 컸던 것을 짐작게 한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아니면 더위를 먹었던지, 매미가 목이 말라 울음소리가 끊어지고 새소리 바람 소리 없는 깊은 산중에 적막감이 흐른다. 마음이 불안하고 큰 짐승이 곧 뛰어나올 것 같아 무서움이 든다.

풍경 소리라도 들리면 덜 적적할 텐데 그마저 없다.
풍경 없는 것이 이 절의 주요한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더 낫겠다.
고향을 지키며 살아왔어도 청화산 법주사에 이만큼 많은 보물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왔다는 것이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때늦은 후회가 나를 엄습해 온다. 두렵고 무서워 눈을 감아 버렸다. 쿵덕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보고 느낀 모든 것을 가슴에 담아 가려고 마음을 단단히 했다.

천년의 고풍을 자랑하듯 법주사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7호(1985)로 지정된 통일신라 시대의 오층석탑이 있다.

석탑의 면은 오랜 세월 동안 모진 풍진 속에 매끈매끈하던 껍질이 다 벗겨나갔고 모래알같이 까칠까칠하다. 모진 세월 속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 여기까지 찾아오너라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 흉하지 않다면 석탑 위에 비가림막으로 덮어주고 싶다.

석탑은 이중二重 기단 위에 쌓은 높이 3.56m의 5층의 탑이다. 상단 기단과 상단 덮개돌 및 4층 이상의 몸돌과 지붕돌은 유실되었다. 하층 기단 덮개돌에는 2단의 굄이 있어 상대 중심의 흔적이 있다.

1층에서 3층까지의 몸돌 및 지붕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특히 1층 남쪽 몸 돌면 에는 문 모양을 새기고 안에 자물쇠를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모서리 기둥과 문틀 옆에는 숙종 17년(1690)에 보광명전을 손질하며 고칠 때 새긴 글씨가 남아 있다. 지붕돌 상면에는 굄이 없고 낙수 면이 깊이 파였고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가 우아한 곡선을 그린다.

그러나 4층과 5층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기지 않았고, 지붕돌의 곡선도 밋밋하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 돌을 차례대로 얹어 놓았는 것 등으로 보아 4층 이상의 부재(部材)는 이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해가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으니 엉덩이에 뿔이 났던지 엉덩이를 엉거주춤해서 들고 고개를 서쪽으로 돌린다. 하늘을 찌르는 울창한 소나무 사이를 헤집고 내리쬐는 햇볕이 기운이 다 빠졌던지 얼굴에 닿아도 느낌이 없다. 한결 시원한 느낌이 든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법주사의 옛 중심 법당인 보광명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글 : 수필가·권춘수 박사
대구가축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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