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인물 독자마당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

admin 기자 입력 2024.08.19 23:06 수정 2024.08.19 11:06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우리는 법적으로 노인의 기준 연령 65세 이상 된 사람을 노인이라 부른다. 나무는 노목의 기준 연령이 없어 수령이 오래된 것으로 판단되면 노목이라 부른다.
노인과 노목의 글자 앞에는 늙은 노(老)자가 있다. 두 글자 모두 늙음을 의미한다. 늙음의 뜻은 같으나 역할은 서로가 다르다.

노목은 사람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지만, 노인은 사람들에게 문화 공간을 제공한다.
둘 다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둘을 쉽게 평가한다. 참으로 안타깝고 비참한 현실 앞에 자연 고개 숙여진다.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하고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니든가.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서 뻔뻔스럽게 사람 노릇 한답시고 으스대 보이는 게 사람들부터 비난의 대상이 아니든가?

한때는 나도 그랬다. 도리를 다하지 못했음에도 청운의 꿈을 가지고 사회에 봉사한답시고 젊음을 화려하게 불태웠던 시절이 있었다.

가는 세월을 비켜 나가지 못하고 여기까지 와 버린 수많은 나날, 이제 와 버림받는 세상에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 남은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 사회에 봉사할 기회를 가지고 싶은 것이 늙은이의 마지막 소망이다.

나무는 나이가 많을수록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대우받으며 산다고 한다는데, 사람은 어째서 나이가 많을수록 사람들로부터 천덕꾸러기 같은 푸대접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나이가 많으면 무조건 싫다? 이건 지나친 망상이다. ‘늙은 쥐 독 뚫는다.’ 힘은 없어도 지혜는 있다는 거다. 그럼, 젊은이들만 사는 세상에서 살겠다는 건가? 세상일이란 게 안갯속 같아 아무도 모른 거다.

이런저런 복잡하게 얽힌 세상 속에 한 줄기 희망의 햇살이 쏟아진다. 어느 깊은 산골에 연세 많은 한 노인이 살고 있다.

그는 젊은이 못잖게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조심스레 그의 면면을 들여다보았다. 너무나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워 나도 그 노인처럼 열심히 살아봐야겠다는 마음이 불끈 솟아오른다.

나는 수의사란 직업을 가지고 가축을 진료하고 인공수정을 하며 축산 개량 발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는 어느 여름 오후. 소 50여 두 사육하고 있는 농가에서 인공수정 하려고 전화가 걸려 온다.

시각에 맞춰 그 집 앞에 도착하였다. 뒤따라 10톤 트럭이 100여 개 넘는 왕겨 마대를 가득 싣고 소 마구간 앞에 세운다.
이윽고 운전석 문이 슬며시 열린다. 90세 훨씬 넘어 보이는 한 노인이 피곤기 없이 차에서 내린다.

멋있어 보였다. 그 연세에 청바지 차림에 줄무늬 티셔츠 입고 시커먼 안경을 낀 모습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인공수정을 빨리 끝내고 그분과 이야기 나누고 싶은 생각이 슬며시 든다.
노인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차 위로 사뿐 올라간다. 눈 깜짝할 사이 10미터 넘어 보이는 아슬아슬한 마대 꼭대기까지 단숨에 올라간다. 깜짝 놀랐다.

누가 90세 넘어 보이는 노인이라 하겠느냐? 한때는 나도 소먹이면서 마대 싣고 온 차 위에 올라가 본 적이 있었다.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순간 머리가 핑 돌고 앞이 캄캄했다. 체력이 대단한 노인이라고 생각했다.

노인과 인사하면서 자리를 함께하였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자식 이야기며 건강 이야기며, 연세가 얼마인지, 힘든 일을 어떻게 하느냐? 등 스스럼없이 물어보았다. 나도 노인이라는 계급장을 달고 있기 때문에 편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노인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친구처럼 재미있게 이야기한다.
교통사고 날 적마다 노인을 운운하면서 행정기관에서 면허증을 반납하라는 요구가 가끔 온다고 한다.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더니 근래에 와서 전화가 오지 않는다고 한다.
면허증의 반납 이야기 나올 적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우울했다며 사실을 토한다.

아직도 우울했던 당시가 생각나든지 애써 밝은 얼굴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인다.
긴장된 탓인지 담배에 불을 연신 달아 붙인다. 남자 두 사람이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
주인아주머니가 냉커피와 과자를 수북이 담은 플라스틱 쟁반을 들고 온다.

노인은 이야기하느라 목이 말랐던지 냉커피 한 잔을 한꺼번에 벌컥 들이마신다. 이야기를 다시 이어간다.

지금까지 모아 둔 재산은 별로 없지만 자식들한테 손 한 번 벌려 본 적 없었다. 자식한테 의지하지 않고 내 나름대로 벌어 먹고살아 왔다며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듯하다.

젊었을 때 따 놓은 면허증을 지금까지 유효하게 쓰고 있다며 면허증에 대한 이야기는 더 하지 않는다.

고향에 있는 친구들은 할 일 없어 빈둥빈둥 놀면서 하루해를 보내는데 여간 힘들어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자기를 부러워한다고 한다.

나는 늘그막이 번 돈으로 친구들과 같이 술 한 잔 나누며 즐겁게 지내는 것이 나에게 유일한 낙이다. 이 순간은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다.

면허증을 조몰락거리며 보인다. 이 면허증은 나에게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 자두며 복숭아 등 여름 과일이 출하가 시작되면 과일을 싣고 시장에 내다 팔아야 한다.

생필품을 사서 가지고 와야 한다. 일상 소소한 일로 읍내까지 가야 한다. 이것이 없으며 허드레 같은 일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꼼짝할 수 없다.

방구석에 한두 달 처박혀 있다가 들것에 실려 돌아오지 못할 요양원으로 간다. 인생이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는 것도 모르고 아웅다웅하며 지내온 삶이 너무나 서글펐다. 인생은 정말로 한 바탕 꿈이었구나! 일장춘몽이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교통사고 전체를 젊은이들과 대비하면 모래알보다 작다. 그런 걸 가지고 어쩌다 경미한 사고가 한 번 나면 대문짝만하게 큰 글씨로 노인을 들먹이는 기사를 볼 때 가슴이 먹먹해진다. 왕겨 실어 나르는 90세 노인의 삶이 부럽다.

내일이면 죽을지도 모르면서 자기가 아니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끼어들어 거드름 피우며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가?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


저작권자 N군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