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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향우소식

117년 만에 찾아온 습설

admin 기자 입력 2025.01.19 23:41 수정 2025.01.19 11:41

↑↑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함박눈이 갑진년 11월 117년 만에 찾아왔다.
사람들은 한데 뒤엉켜 기쁨을 만끽한다. 눈싸움도 하고 눈 위를 달리다 미끄러져 엉덩방아 짖기도 한다. 퍼그와 같은 눈사람 만들어 놓고 개미허리 잡고 깔깔 웃어대며 허리를 펴지 못하기도 한다.

눈을 뭉쳐 친구 등 뒤에 몰래 집어넣고 친구가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보기도 한다.

함박눈 내리는 날은 티 없이 맑은 웃음꽃이 활짝 핀 행복한 시간이다.
백여 전 눈의 얼굴 모습이 본래 그랬던지 무섭고 낯설다. 지금까지 포근하고 따뜻했던 눈과 다르다.

천만리 머나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습설에 온 국민이 떠들썩하게 환영했건만 무엇이 못마땅한지 골이 잔뜩 난 얼굴로 우리에게 주려고 가져온 선물을 들이 내민다.

흰 백합 꽃송이 하나둘 실바람 타고 날갯짓하며 훨훨 내려온다. 전깃줄 위에 앉고 지붕 위에도 소록소록 내려앉는다.

눈 깜짝할 사이 장안은 설국으로 변해 버렸다. 시간이 점차 갈수록 웃음을 잃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불안과 근심이 자리를 잡는다. 쏟아지는 꽃송이에 집들이 버티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진다.

가로수가 뿌려지고 전기가 끊기고 수도가 끊긴다. 장안은 한순간에 암흑천지로 변해 버렸다. 사람들은 우왕좌왕 어찌할 바 모른다.

고속도로는 블랙아이스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50여 대 자동차가 연쇄 추돌사고로 한데 뒤엉켜 아수라장이다.

십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자동차, 유리창만 깨어진 차들이 도로를 점령하고 있다.

고속도로는 마비되고 통행이 금지되었다. 출동한 119구급차가 앵앵거리며 환자를 실어 나른다. 실려 가는 환자들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눈뜨고 참아 볼 수 없는 목불인견이라 할까, 끔찍한 대참사였다.

농촌의 피해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축사 지붕이 폭삭 내려앉아 십여 마리 소가 깔려 죽었다.

가난을 벗어나려고 젖먹이를 등에 업고 부푼 꿈을 안고서 소와 더불어 살아오던 한 젊은 새댁, 죽은 소를 붙들고 통곡한다. 세상은 너무나 잔인했다. 숨 죽은 산골짝에 통곡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온다.

집 잃은 어미 염소는 십여 마리 어린 새끼를 데리고 오갈 때 없어 벌벌 떨면서 눈 위에서 꼬박 밤을 지새우고 있다.

새끼들은 배고프다며 소리소리 지르며 어미 품속을 더듬는다. 비닐하우스 파이프가 내려앉고 찢어져 인삼 딸기 포도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농가들은 넋 잃어 망연자실한다.

이틀 동안 내린 폭설로 장안은 슬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졌다.
서울 지역은 28.6cm로 역대 3위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남쪽 지방 부산은 이국적인 풍경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열대지방이다. 두꺼운 옷 입고 걸어 다니는 사람 찾아볼 수 없다. 이마에 흐르는 땀 훔치며 팔다리 내놓고 걸어 다는 사람뿐이다.

서울은 눈 속에 파묻혀 아우성치는데 부산은 서핑으로 한가로이 여유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기후 변화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부산 시민들이 눈 구경하려 서울 올라간다는 말에 그냥 흘려듣고 지나갈 일이 아니었다.

117년 전이나 지금이나 겨울이면 반드시 눈이 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전에 인지 못 한 자괴감이 밀어닥친다.

자연은 그대로인데 나만 변한 것 같아 한심스러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각건대 어릴 때 내렸던 눈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내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무릎까지 펑펑 쏟아지는 것은 예사였다. 그럼에도 오늘과 같이 부산은 떨지 않았다.

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어느 겨울, 마당에 쓸어 모아 놓은 눈을 지게 지고 밖으로 퍼 날랐다. 빨리 퍼내고 싶은 조급증을 이기지 못하고 지게에 눈을 가래로 한 번 더 퍼 얹었다. 지게 작대기에 의지해서 비틀거리며 일어서려고 하는 찰나에 작대기가 뚝 부러졌다. 지게를 짊어진 채로 쓰러졌다. 흙 묻은 눈이 나를 덮쳤다. 눈 속에 파묻혀 한참 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그 후 나는 눈 오는 날이면 싫어했다. 특히나 습설은 무거워서 지게 지고 퍼 나르기가 힘들어 더욱 싫었다. 눈만 보아도 언제 다 치울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때로는 눈이 내리면 겁에 질려 아버지 눈을 피해 슬금슬금 도망치기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럼에도 겨울은 싫어하지 않았다. 얼음이 꽁꽁 얼어붙은 날은 또래와 같이 얼음 타는 재미로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6·25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전쟁놀이가 최고였다. 운동회 때 청군 백군 갈라 기마전 놀이는 빼놓을 수 없었다. 얼음 탈 때도 항상 그랬다. 편 갈라 전투식으로 놀고 했다.

또래들과 같이 눈싸움할 적에는 정말 신났다. 눈을 두 손으로 야무지게 뭉쳐 주먹만 하게 만들어 상대편을 보고 던지며 공격한다. 상대편이 맞아 달아나는 걸 보고 깔깔 웃어대며 신나게 놀았다.

추운 날씨인데도 등에서 김이 무럭무럭 난다. 집에 돌아오면 무엇을 했기에 등에 땀이 서려 있냐며 어머니가 꾸중하다시피 말씀하신다. 어린 마음에도 공부하지 않고 뛰놀면서 땀 흘렸던 것이 잘못한 것 같아 말하지 못했던 그때 그 시절 아련히 떠오른다.

눈에 얽히고설킨 사연 중에 117년 만에 찾아온 순백도 들어간다. 겉은 번지르르하고 속은 시커먼 숯과 같은 너를 보고 싶어 사람들은 고대하며 나날을 보냈다.

네가 오던 날은 들뜬 기분으로 환영하며 반가이 맞이해 주었다. 그럼에도 너는 무엇이 못마땅했던지 골이 잔뜩 난 얼굴로 우리를 찾아왔다.

너는 오자마자 망나니 칼춤 추듯 네 멋대로 설쳐 댔다.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고 못살게 볶아 대기도 했다.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며 117년 동안 갈고닦아 온 행실이 고작 그것뿐이던가 고약한 것 하며 다시는 너를 만나 보지 않겠다고 한다. 이렇게 만날 것 같았으면 차라리 만나지 않은 것보다 못했다.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다.

비록 만남이 짧았지만 즐겁게 놀다 가면 오죽 좋으련만 아쉬움만 가득 남겨 놓고 가는구나. 다음에 올 기회가 있으면 자질구레한 선물 가져오지 말고 화려한 군무를 앞세워 노랫가락에 맞춰 둥실둥실 춤추며 한바탕 신나게 놀다 가려무나.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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