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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독자마당

갈 길 잃은 길손

admin 기자 입력 2024.08.05 15:32 수정 2024.08.05 03:32

↑↑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 N군위신문
“피는 물보다 진하다.” Blood is thicker then water. 전설 같은 이 이야기는 200여 년 지나도록 변함이 없다. 어둠이 내리 앉고 사방이 조용해진다. 남들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고, 내 삶 마지막까지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새로운 이정표를 찾아 떠난다.

사람들이 봉사하는 것은 쉽다고 하던데 믿어지지 않는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넘치는 패기와 열정으로 봉사해 보겠다고 집을 떠나온 지 30여 일이 훌쩍 지났다.

불어닥치는 거센 파도에 밀려갈 길을 잃어버리고 쓰러질 듯한 비틀걸음으로 남의 집 처마 밑에 아무렇게 주저앉아 어깨에 걸친 무거운 괴나리봇짐을 풀고 밤을 새운다.

귀뚜라미 풀벌레 울어대는 깊은 가을밤, 어두 캄캄한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별들을 쳐다보면서 지난날 마음속 깊이 간직해 두었던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풀어 보려고 한다.

일찍이 향토 문화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문화원에 가입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10여 년이 훨씬 지났다.

어느 날 원장에게 『변화하는 군위 문화원』을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넌지시 던져 보았다.
원장은 밝은 미소로 반기며 내 양손을 덥석 잡아준다.

그 후 나는 문화재에 대해 더욱더 관심을 가지고 소보 법주사, 군위 지보사, 삼국유사면 인각사, 압곡사 등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땅속에 묻혀 있는 향토 문화재 발굴에 정열을 쏟아 왔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어느 날, 원장이 어려운 발걸음으로 우리 집을 찾아왔다. 차기 문화원장 선거 후보자 등록이 오늘 오후 6시로 마감했다는 소식을 전해 준다.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나에게 왜 들려주려고 왔는지 알 수 없다.

뜬금없는 황당한 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시계는 멈추지 않고 수레바퀴처럼 돌아간다. 새 원장이 탄생하는 날이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변화하는 군위 문화원』을 만들어 보겠다며 마음을 다짐하였다.

그 후 얽히고설킨 복잡했던 관계를 훌훌 털어버렸다. 답답한 마음이 홀가분했다. 마음을 비우고 나니 이렇게 좋은 걸 왜 진작 비우지 못했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비운만큼 채울 수 있다는 진리에 위로가 되어 아쉬움을 잊은 채 기분이 더욱 좋았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던가? 살다 보면 잊었던 지난 과거가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마당에 잔설이 남아 있는 이른 봄, 직원들과 새해 인사하는 자리에서 문화원장 임기 이야기가 나왔다.

다시 한번 더 연임하겠느냐 하는 말이 오갔다. 원장은 그때가 봐서 결정하겠다, 잘라 말하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설 명절 지나 꽃들이 화장을 짙게 하고 살며시 얼굴을 내밀 때였다. 보이지 않는 선거 바람이 솔솔 불기 시작한다.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인 나에게도 선거 바람이 나를 부추긴다.
나라고 어쩔 수 없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치열한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선거를 한 번도 치러보지 않은 나로서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선거를 어떻게 치러야 잘 치르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면 된다”는 열정 하나만 가지고 뛰어들었다. 남들이 선거에 출마하는 거를 보고 쉽다고 판단했던 것이 나의 큰 오산이었다.

열띤 선거전에 들어와서 보니 생각지도 못한 희한한 세상과 마주칠 때도 있었다. 중상모략 비방 난폭 등이 난무하는 뒷골목 같은 새 세상이 눈앞에 전개되는 것이 아니든가.
날카로운 탐색전이 시작된다.

필요 없는 말을 넌지시 던져놓고 상대방의 감정을 살펴본다. 공수를 거듭하는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감정싸움이 꿈틀거리기 시작된다.

교통 정리를 해도 신호등이 싸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끝까지 해 보자는 걸까, 선거 열기가 점점 더 뜨거워진다. 알지도 못한 사람의 이름을 마구 대면서 자기의 우월성을 과시한다.

자기 집 족보까지 들춰내며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한다. 선거란 이런 것이구나! 재미있고 비참하고 참담했다, 그렇다고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거 없는 거 총동원해서라도 표를 끌어모아야 한다. 선거에 표는 생명과 같은 귀한 존재 가치가 있다.

선거에서 제일 중요한 3대 요소는 혈연, 학연, 지연이다. 이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혈연이다. 이스라엘 대학생들은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조국을 위해 한 걸음 달려간다는 오래된 이야기 있다.

혈연관계를 두고 한 말이겠다.
어떤 한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게 되면 거기에는 자연스레 삼촌 형제 아저씨 조카 등 촌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살다 보면 약간의 의견 차이로 시비가 붙는다.

엄연히 촌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촌수마저 무용지물이다. 하루가 멀다고 고성이 오간다.
그러다 집성촌에서 누가 선거에 나오면 원수같이 싸움하다가도 한데 똘똘 뭉쳐 선거에 힘을 실어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때 대 가족을 이루고 사는 집성촌의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우리 성씨는 가물에 콩 나듯 오다가다 볼 수 있는 성씨다. 남들이 양반 성씨라 하지만 선거에서 다른 성씨에 대비하면 절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이다.

의지할 곳 없어 사방팔방 뛰어다닌다. 뜻밖에 귀인 두 사람을 만났다. 행운이 찾아온 것 같아 불안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선거 운동에 집념할 수 있었다. 처져있던 기분이 한순간에 업그레이드되어 기쁨의 순간을 맛보았다.

어깨를 으쓱이며 힘찬 발걸음을 내디딘다.
후보들은 사방을 쫓아다니면서 얼굴 알리려고 구슬땀 흘리며 명함을 돌리기 시작한 지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선거에는 선거를 돕는 척 자기 이익만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다. 선거 분위기가 무럭무럭 익어갈 무렵 생각하지도 않은 또 다른 한 후보가 갑작스럽게 선거에 뛰어든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 아무 말이 없었다.

선거는 4파전으로 벌어졌다.
마음에 부담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후보들은 자기의 기지와 기량을 마음껏 뽐내며 젊은 운동원을 동원한다. 가족을 동행한다.

특유의 언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모은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악재였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던가, 남들 보기엔 초라할지언정 내 딴엔 비상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문화원에는 시조창, 한글 붓글씨, 시 쓰기, 노래교실 등 40여 개 동아리 회가 있다.

사람들에게 내 얼굴을 알리기 위해서는 여기에 가입하는 것이 최고 같아 가입했다.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한다.

긴장했던 마음이 약간 누그러지고 승부에 자신감이 조금씩 붙기 시작한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바깥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역량이 여기까지가 전부인가 싶어 때로는 허탈할 때도 많았다.

지나간 일이지만, 선거운동을 할 때 회원들의 명단을 몰라 매우 힘들었다. 선거가 종반전으로 치닫자, 명단이 공개되었다.

기호를 넣은 새 명함을 새겨 돌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일찍이 명함을 많이 받았고 하면서 식상해하는 것 같아 보여 마음이 무거웠다. 나 역시 돌리려고 마음먹으니 서먹서먹해진다.
그럼에도 염치 불고하고 돌리고 또 돌리고 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찾아간다. 허리 굽혀 절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버렸다.

내비게이션으로 회원 집을 찾아다닌다. 도심지에는 그나마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시골 첩첩산중에는 내비게이션도 길을 잃어버리고 쩔쩔 헤맨다. 기가 차고 난감한 일이 한두 번 아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간다. 내비게이션이 일부러 나를 애먹이려고 하는 것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내가 회원을 만날 때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을 보고 내비게이션이 나를 얕잡아 보는 것 같아 화가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더위에 길 찾아다니면서 일을 너무 많이 시킨다고 골 부리면서 엉뚱한 데로 나를 데리고 간다.

낯선 길 어중간 지점에 날 내려놓고 100여 미터 안에 회원 집이 있다며 나보고 찾아가라고 하며 골탕을 먹인다.

이렇게 하기를 수없이 했건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내게 한 표 준다는 보장도 없다. 쉴 새 없는 피로로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한 집을 찾았다. 주인이 있는 집 있고 없는 집도 있었다. 수고한다고 인사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더라.

이것이 선거이구나! 표를 가진 유권자들의 늠름한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인정이 메마르고 삭막한 세상 같았다.

선거는 내가 치러야 하므로 한 인간으로서 약간의 서운함은 있었지만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소낙비처럼 쏟아진다. 산기슭에 자리 잡은 아담한 동네에 회원이 여러 명 있다.

하루 종일 찾으면 되겠지 간단히 생각하고 빗속을 헤치며 회원 집을 더듬거리며 찾기 시작한다.

주소가 새로운 주소로 바꿔 찾는 데 애를 먹는다. 점심나절까지 한 집 겨우 찾고 힘에 겨워 쓰러질 것 같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종일 용쓰며 찾아다니느라 열이 불덩이 같았다. 끙끙 앓으며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총성 없는 전쟁이다.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차를 몰고 다시 그 동네를 찾았다. 잠시도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부지런히 뛰어야 한다.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던 할머니 집을 찾아갔다. 이런저런 사연을 이야기하고 도와달라고 청하였다.

할머니는 두말하지 않으시고 어려운 일에 내가 도와줄 일 있으면 도와주고 말고 하시면서 운전석 옆에 덥석 올라탄다. 쳐진 힘이 절로 솟는다.

내가 찾는 회원 집은 산중에 있다. 내비게이션도 길을 못 찾는다. 할머니와 꾸불꾸불한 산길 따라 조심스레 올라간다.

올라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가 아뿔싸! 이 길이 아닌 것 같다. 옛날 산판 할 때 자동차가 다녔던 길인 것 같다. 하시면서 할머니답지 않게 미안한 듯 머쓱해하신다.

45도 되는 가파른 산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올라갈 때는 몰랐는데 내려갈 때는 가슴이 두근두근 이마에 구슬땀이 비 오듯 흐르고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할머니가 놀랄까 봐 태연한 척 숨죽여 가며 조심스레 내려왔다. 해가 뉘엿뉘엿할 무렵 할머니 덕분으로 동네 한 바퀴를 무사히 돌았다. 연세가 많으신데도 불구하고 같이 가 주셔 너무 고맙고 감사하였다. 평생 잊을 수 없는 할머니였다.

이렇게 하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군위 8개 읍면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얼굴에 도장을 찍으러 다녔다.

오늘이 투표하는 날이다. 후보자들은 제각기 열심히 선거 운동한 성적표를 들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투표 장소로 모여든다.

『도전, 개혁, 혁신』의 정신으로 『변화하는 군위문화』를 만들겠다는 저의 5분 발언 끝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서 투표 시각을 알린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 얼굴들이 물밀듯이 몰려온다. 투표 참가율이 약 90% 넘었다고 한다.
예상 밖이었다. 마음이 약간 착잡했다. 혹시나 하고 내 성적이 얼마쯤 될까 궁금했다. 투표 결과를 보고 말없이 투표 장소를 빠져나왔다.

내 나이 이날이때까지 내 삶을 초라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자책하며 앞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면서 모든 이에게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살리라 마음먹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Blood is thicker then water)는 진리를 깨뜨릴 수 없었다.

아직도 녹슬지 않은 열차는 힘이 넘친다. 수평선 저 너머 끝없이 달리고 싶어 한다.

대구가축병원
권춘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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