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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삼절(松都三絶), 황진이(黃眞伊)

admin 기자 입력 2024.08.05 15:33 수정 2024.08.05 03:33

↑↑ 황성창 시인
ⓒ N군위신문
황진이(黃眞伊)는 조선 중종 때 황 진사 댁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모친의 가르침으로 사서삼경을 읽었고, 시조, 서예, 음률 모두에 뛰어났으며 용모 또한 매우 아름다웠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동네 총각이 그녀를 사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었을까, 예기치 않았던 촌각의 죽음으로 자신이 첩의 자식이라는 탄생의 비밀까지 알게 되었다.

이에 충격받은 황진이는 자기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겠다고 결심하고 신분의 벽을 넘어 ‘기계(妓界)’로 뛰어들었다.

천부적인 시재(詩才)와 노래로 으쓱거리며 뽑내 던 선비들을 매료시켰다.
그녀는 당시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지족(知足)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켰고, 조선 중기 대학자 화담(花潭) 서경덕에게 은밀히 정을 통하려다 포기하고 사제관계를 맺었다.

송도삼절(松都三絶)이란 송도(옛 개성)에서 가장 빼어난 것 세 가지를 말하는데, 박연폭포, 서경덕, 그리고 황진이 자신이다. 황진이가 서경덕의 존재를 알고 난 후 스스로 송도삼절이라 붙였다.

당대 내로라하는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또 풍류객으로 자처하던 조선 왕족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爛熟)한 시작(詩作)을 통해 독특한 애정관을 표현했다.

황진이는 시, 노래, 춤, 미모, 이 모든 것을 갖춘 시쳇말로 당대 톱스타다. 한양과 평양까지 조선 천지에 명성을 떨치던 스캔들 주인공이기도 했다.

당시 관습화되어가던 시조에 변형적인 표현으로 활력을 불어넣은 시인이다. 황진이의 작품 중에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을’ 외 5편과 한시 ‘상사몽’ 외 7편이 청구영언, 해동가요, 동국시선, 가곡원류, 대동풍아 등에 수록돼 전해져 왔다. 특히 남파(南坡)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수록된 그녀의 시조 6수는 조선 시조 문학의 걸작으로 꼽는다.

야사에는 황진이를 관능적인 명기(名妓)로 부각시켜 몹시 안타깝다.
그러나 허균, 이덕형, 이긍익, 김천택, 유몽인 같은 당대 뛰어난 문사들은 황진이를 시조와 노래를 조화시킨 시인으로 높이 평가했다. 그녀는 태생적 운명의 굴레를 벗고 허위와 가식이 득세하던 시대적 환경에서 이방인이다시피 살았다.

조선의 폐쇄적인 신분제도에 불만이 많았던 황진이였지만, 전설적인 가인(佳人)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리매김하고 있다.

황진이는 1998년 동아일보가 선정한 한국의 주선(酒仙) 10걸 1위로 장원에 올랐다. 풍류 호걸 1위에 황진이, 2위 변영로, 3위 조지훈, 4위 김삿갓(김병연), 5위 김시습, 6위 임재. 7위 김동리, 8위 임꺽정, 9위 대원군, 10위에는 원효대사, 연산군, 박종화 등이 공동으로 뽑혔다. 우리 역사상 고금을 통틀어 최고의 주객에 선정된 황진이는 정말 대단한 여장부다.

선정기준은, 주선의 자격을 한국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주량과 풍류가 대단한 당대의 호걸이 대상이다.
대상 인물을 낙주종생(樂酒終生)의 생애를 산 사람에 한했다는데, 여기에 해당 인사로 추천된 명사들은 모두 140명이었다고 한다.

황진이는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는 천하제일의 명사라 해도 과찬이 아닐 것 같다. 그 정도로 일색이니 사대부들도 ‘오금을 못 펴 쩔쩔맸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황진이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그의 유서는 전해지고 있다.

“저는 천하의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자애(自愛)할 수 없으니,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제가 죽거든, 금수(錦繡)고 관(棺)도 쓰지 말고 옛 동문 밖 물가 모래밭에 시신을 내버려 개미와 땅강아지, 여우와 살쾡이가 내 살을 뜯어 먹게 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저를 경계 삼도록 해 주세요.” -황진이 유언-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인 왕소군(王昭君)은 뛰어난 미모와 거문고, 서예, 그림, 바둑 등 기에(技藝)를 두루 갖춘 미인이다.

심지어 하늘을 날아가던 기러기가 왕소군의 아름다움에 정신이 팔려 하늘을 날던 것조차 잊어버리고 땅에 떨어졌다는 일화로 ‘떨어진 기러기’ 낙안(落雁)이라는 말이 생겼다. 아무렴 ‘왕소군’이든, ‘클레오파트라’든 절세의 미모가 조선의 황진이만큼이나 아름다웠을까. 턱도 없는 말일 성싶다.

황진이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나 지났다. 그런데도 그녀를 그리워하고 기리는 일들은 끊이질 않는다. ‘황진이’ 노랫말을 조용필·박상철 두 가수가 신나게 부를 때마다 얼씨구 좋다 들썩거린다. 1957년에 상영한 첫 영화 도금봉 주연 ‘황진이’도 엄청난 관객 동원으로 힛트를 쳤다.
그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또 다른 ‘황진이’ 영화가 5편이나 다른 감독과 주연배우에 의해 제작 상영했다. 그뿐인가.

황진이 이름을 소재로 한 드라마도 KBS에서 방영했다. 오페라 공연도 하고---왜 이토록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할 수 있을까? 그만큼 황진이는 한 시대를 뛰어넘는 걸출한 문화예술인이다.

황진이를 소재로 소설, 영화, 드라마, 오페라, 가요 등등의 작품이 20여 편 넘게 나왔다.
‘황진이’는 조선 시대 서녀의 신분으로 태어난 비운의 여인으로, 그녀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리 발버둥 쳐본들 희망이 보이지 않은 ‘케세라세라’될 대로 살아보자는 삶의 흔적도 엿볼 수 있다.

만약 황진이가 양반집 규수(閨秀)로 태어났다면, 어떤 삶의 자취를 남겼을까? 뛰어난 미모에다 문학을 포함한 조선의 기득권 사회에 큰 변혁을 일으켰을 성싶다. 우리 여성사에 크게 빛낼 별이 신분제도의 장벽에 막혀 빛을 관통하지 못하고 사라진 애석함이 가슴에 차오른다.

황성창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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