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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춘수 원장 |
| ⓒ N군위신문 |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땅! 땅! 땅!
여행 일정이 잡히자 마음을 움츠리고 초조하게 기다리던 노인들은 벌써 마음이 들떠있다.
일상에서 일탈하여 어디든지 떠나 가보고 싶었지만 언제나 마음뿐이다. 꿈만 같은 생각에 쭈그러진 이맛살이 펴지고 메마른 가슴에 단비를 만난 듯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지금까지 바쁘다는 핑계로 노인회에 가입하지 않았다. 뒤늦게 가입을 했다. 그런데도 회원들 모두가 따뜻이 맞아 주어 그동안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여태까지 한마을에 같이 살면서도 길 인사만 했을 뿐 따뜻한 말 주고받은 적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밥상머리에 같이 앉아 얼굴 맞대고 밥 먹어 본 적은 더구나 없었다. 이제는 마음 편히 동네에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면 반갑게 만나 밥상머리도 같이 하면서 웃고 떠들고 한 식구가 되었다.
동네 분들과 같이 처음으로 여행가는 날이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아침 햇살이 우울하던 마음을 상쾌하게 해 주었다. 07:30분 노인회관으로 모이라는 전화에 꼭두새벽에 일어났다.
하루 중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소한테 여물 주는 일이다. 어물을 대강 주고 숨 가쁘게 시각에 맞추어 갔다. 다른 사람들도 출발 시각에 맞추어 창이 긴 모자를 쓴 사람 밀집 형 모자에 선글라스 끼고 헐렁한 옷차림을 한 사람 이상한 마크가 새겨진 모자를 쓴 사람 제각기 한껏 멋을 부리며 어슬렁어슬렁 걸음으로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출발시각이 점점 가까워져 가는 데 무심코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될 휴대폰을 깜박 잊고 왔다. 회관에서 거의 5백여 미터 떨어진 집으로 헐레벌떡 뛰었다.
노인들의 여행은 신경이 쓰인다. 무료(無聊)한 나날을 앉아서 보내다가 갑자기 활동량이 많아지면 피로가 빨리 오기 때문에 건강 상태를 꼼꼼히 살펴보아야 했다.
경주를 거쳐 포항 영덕 청송을 당일로 다녀오기로 했다. 처음으로 경주를 찾았다. 신라문화의 유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경주 박물관에 갔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이 보였다.
일명 봉덕사종 에밀레종이라고도 부른다. 이 종(鐘)은 통일신라 36대 혜공왕이 771년에 선왕 성덕왕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1200년 넘는 신비스러운 에밀레종 소리는 비록 녹음으로 된 소리이었지만 은은하고 감미로웠다. 박물관 안에는 금으로 만든 장신구와 금관이 신라의 화려했던 황금 문화를 자랑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며 허기를 재촉했다. 차창을 뚫고 들어온 늦은 봄 햇살에 졸음을 참지 못하고 깜박 잠이 든 사이에 허기를 간신히 면했다.
버스는 노인들의 배고픈 심정을 알아차린 듯 바쁘게 서둘러 포항에서 회(膾)로 유명한 어느 한 식당으로 우리들을 안내해주었다.
식당에서는 차림을 다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고프면 무엇이든 맛있었다.
정신없이 먹느라 기침 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얼마 후 허기를 면했던지 음료수 소주 막걸리 찾는 사람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불그스레한 얼굴에 취기가 도는 듯한 사람들이 한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마치 식당이 우리 집 안방 같았다. 노인이 노인답게 사는 것도 노인의 몫이라 하던데…, 어쨌든, 노인들에게는 점심시간만큼은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없었다.
버스는 대게로 이름난 영덕으로 쉼 없이 내달리고 있다. 피로에 지친 사람들은 점심 후 식곤(食困)에 못 이겨 연신 고개를 끄떡인다. 버스 안은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하다.
평소에 말이 없던 사람이 뒷좌석에서 걸어 나온다. 슬그머니 마이크를 잡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머뭇거린다. 얼핏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긴장을 했다.
잠시 후 그 사람은 조금도 어색함 없이 차분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제가 홀아비 고추 농사와 과부 고추 농사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사람들은 과부와 홀아비 말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든 줄 알고 잠이 확 달아났다.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숨죽여 들었다.
어느 과붓집 고추밭 곁에 딸 하나만 가진 홀아비 고추밭이 있었다. 고추 농사를 짓고 나면 과붓집 고추는 늘 풍년이 들었다. 그런데도 딸만 가진 홀아비는 매년 망치다시피 되었다.
이상하게 여겼던 홀아비는 어느 달밤에 과붓집 고추밭에 몰래 나가 보았다. 휘영찬 밝은 달빛 아래 과부가 나왔다.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고추밭 고랑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고추들이 풍만한 가슴에 쭉 빠진 몸매를 보고 고개를 쳐들고 뻣뻣하게 서 있다.
이를 지켜본 홀아비는 딸을 고추밭에 데리고 나왔다. 옷을 홀랑 벗기고 고추밭 고랑을 이리저리 뛰게 하였다.
숫처녀의 풍만한 가슴과 늘씬한 몸매는 과부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에 놀란 고추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쳐들고 식을 줄 모르고 빳빳하게 서 있었다.
홀아비는 무릎을 ‘탁’ 치면서 그러면 그러지 만면의 웃음이 가득했다. 그런데도 고추를 수확할 때가 되자 숫처녀가 쫓아다녔던 고추밭 고추들은 하나같이 터져 버렸다. 홀아비는 고추 농사를 또 망쳤다는 이야기에 폭소를 자아내었다.
버스는 힘에 부대끼었든 지 쌕쌕거리며 영덕 대게 시장이 내려다보이는 해맞이공원 삼사해상공원(三思海上公園)에 도착했다. 누구인지 꽹과리와 북 치는 장단에 녹음한 노래를 확성기를 통해 부르며 사람들의 흥을 돋워 준다.
노랫가락에 들떠있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우리 회원들도 둥실둥실 춤추고 있는 사람들 틈에 끼어든다. 어디에서 저런 용기가 나왔던지 저 나이에 저런 용기가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엉덩이를 흔들며 나풀나풀 춤추는 모습이 마치 황혼의 로맨스를 엮는 한 장면과 같았다.
노인은 잘해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다. 몇 차례 맞은 위기를 무사히 넘길 때마다 간장이 써늘했던 순간, 한 노인의 재치 있는 농담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배꼽 쥐고 웃었던 순간, 나풀나풀 춤추는 모습, 이 모두는 우리에게 너무나 괴로웠고 즐거웠고 아름다웠다.
피로함이 역력함에도 작별 시각이 다가오자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내년에 또 만나자며 굳은 악수를 하고 해어졌다.
대구가축병원 원장 권춘수